한국계 콜롬비아
작가 갈라 포라스-김(Gala Porras-Kim, b.1984)은
과거의 문명이 남긴 흔적이 현대의 맥락에서 규정되고 정의되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왔다. 작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같은 제도적 공간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부터 소리, 언어, 역사와
같은 무형의 유산이 가진 다층적인 맥락들을 살펴본다.
갈라 포라스-김의 초기 작업 〈휘파람과 언어의 변형〉(2012)은
멕시코 사포텍 원주민이 사용하는 성조 언어 사포텍어를 휘파람으로 번역한 사운드를 비닐 레코드판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사포텍어는 16세기부터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사용된 언어로, 휘파람의 성조로 단어를 모방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대화를 음악으로 위장하는 데에 쓰였다.
포라스-김은 오늘날까지 오직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다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인 사포텍어를 자신의 휘파람으로 모방하여 녹음하고 나아가 그 소리를 음표로 위장했다. 사라져 가는
언어에 대한 작가의 작업은 정확히 판독할 수 없는 언어,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보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2017년에 제작된 〈근육 기억〉(2017) 또한 기록되어 있는 확실한 자료가 없는
상태로 한국 전통 춤을 시도하는 무용수의 실루엣을 기록하는 영상 작품이다. 몸과 몸으로 전승되어 온
전통 춤은 완벽하고 동일하게 보존된 상태로 전승되기 어렵다는 존재론적 취약성을 가진다. 무용수마다 다른
체형과 해부학적 구조, 안무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몸을 움직이며 형성된 근육의 기억은 저마다의 지식을
보존하고 보관하는 그릇이 된다.
무용수의 실루엣만이 드러나는
영상은 이러한 춤이라는 무형 문화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몸과 근육 자체에 주목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집단적 역사에서 전승되어 온 무형의 문화유산을 서구의 근대성으로부터 벗어난 방식으로 기록하고 작가만의 예술적 방식으로 번역한다.
또한 포라스-김은 마야문명, 이집트, 고인돌 등 고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들이 발굴되고 전시나 보존을 위해 박물관으로 옮겨짐으로써,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유물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연구와
보존을 이유로 강제 이주된 유물들은 인위적으로 시간을 정지시킨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 갇히게 되거나 유물의 자격을 박탈 당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본래의 역할과 자리를 잃은 유물들에 내재한 굴곡진 삶을 들여다 보며, 문화와 역사를 보존한다는 명분 하에 형성된 제도의 관습과 정책 등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직접 소장 기관이나 연구소와 협력하여 관련 규정과 법을 모색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가령, 2019년 작업인 〈테오티우와칸 태양의 피라미드의 제의 요소들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은 거대 피라미드 유적지인
멕시코 테오티우와칸에 위치한 태양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던 거석 두 점에 관한 다학제적 예술 실천을 보여준다.
본래 제의적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두 개의 거석은 현재 박물관으로 옮겨져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두 개의 구멍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포라스-김은 연구소의 허가를 받아 두 거석의 복제품을 제작한 다음, 연구소에 문서 형태의 제안서를 보냈다. 제안서에는 이 구조물들에
내재된 제의적 의미들을 되살리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거석이 있었던 위치에 자신이 제작한 복제물을 대신 세우는 방법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작품과 함께 놓인 검은색의
모노크롬 회화 작품 〈테오티우와칸 태양의 피라미드 꼭대기의 도굴된 구덩이에서 보이는 두 개의 별〉(2019)은
태양의 피라미드 내부에서 바라본 어두운 밤하늘을 흑연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태양신을 숭배했던
테오티우아칸인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던 태양의 피라미드에 담긴 우주론을 반복적인 연필의 움직임으로써 천천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시적인 방식으로 소환한다.
포라스-김은 유물이 내재한 의미를 되살리는 데에서 나아가 유물의 영적
생명을 회복하고 억압된 마술적 힘과 능력을 일깨우는 작업을 진행한다. 작가는 서양 인식론에 기초한 현대
과학 기술이 미신이나 원시성으로 치부한 유물을 둘러싼 맥락들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풍경을 위한 강수〉(2021-진행 중)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치센이사의 세노테
동굴에 깃든 신성한 역사를 소환한다. 이 신비한 천연 동굴은 마야인들에게 세속 세계와 저승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비의 신 ‘차크’가 머물다 가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20세기 초반, 그곳에
있던 유물들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 부속 피바디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되며 약 3만여 점의 유물과 유해들은
비의 신 차크로부터 떨어진 채 빗물이 닿을 수 없는 건조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포라스-김은 피바디 박물관 관장에게 이 유물들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모아 본래의 환경에서처럼 빗물을 만나게 할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 세노테 유물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먼지를 모아 중앙아메리카에서 자라는 열대식물인 코팔나무에서 나온 수지와 섞어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오브제가 다시
빗물과 만날 수 있도록 전시 기관과 협력하여 매일 오브제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진행했다. 이로써 오브제는
유물 및 유해와 마야 문명의 신 차크를 다시 이어주는 의식의 매개체가 된다.
한편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우리를 구속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도피〉(2020-진행중)는 박물관에 전시된 시신의 영혼을 소환하는 회화 작업이다. 2019년 작가는 광주를 방문해 국립광주박물관 전시실에 놓인 시신들이 선택하지 않았을 제도적인 사후의 삶에
대해 고찰했다.
이후 포라스-김은 잉크 얼룩으로 점을 치는 ‘네크로만시’를 통해 이들의 영혼을 소환하여 자신의 유해가 안식되길 바라는 위치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종이 마블링 기법을 통해 물감이 물의 표면에 떠 있는 상태에서 영혼들과 접촉해 자신의 유해가 있으면 좋을 이상적인
장소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구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2022년 작업 〈만기의 순간 나타난 영원한 흔적〉은 영국박물관 수장고에서 수집한
곰팡이 포자를 세균 배양액에 적신 모슬린 천에 증식시키고 아크릴 진열장에 넣어 번식하는 과정을 담은 작업이다.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곰팡이 포자는 점점 증식하기 시작하며 텅 빈 천을 풍성하게 채움으로써 변화하고 살아있는 미시세계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보통 곰팡이 포자는 소장품들의
보존 상태를 드러내기에 소장품의 일부로 분류되어 수장고에 머물게 된다. 포라스-김은 수장고 안에 갇힌 곰팡이 포자를 채집해 증식시킴으로써 소장품이 수장고를 떠나 새로운 형태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전시를 위해 제작한 〈세월이 남긴 고색의 무게〉는 전라북도 고창에 위치한 고인돌을
주제로 한다. 기원전 첫 번째 밀레니엄 기간 동안 묘지의 표지석으로서 제의적인 기능을 수행했던 고인돌은
시간과 함께 역사 속에서 그 의미와 기능이 잊혀졌다가 2000년도에 다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본래 평범한 자연물이었던
돌은 무덤이라는 인공물이 되었다가, 마을 사람들이 빨래를 말리고 고추를 말리는 냉장고 대용으로 쓰는
장소도 되었다가, 오늘날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작가는
세월과 함께 변화해온 이러한 역할에 주목하며 고인돌을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의 관점을 세 점의 대형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연필의 흑연으로 여러 번
칠한 검은 색면의 드로잉에서는 고인돌에 묻힌 죽은 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풍경을, 마치 사진처럼 고인돌을
묘사한 드로잉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현재의 상황을, 추상적인 색 패턴의 드로잉은 곤충과 동물을 비롯해
수천년 동안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이끼의 시점에서 본 풍경을 상상하며 묘사한 것이다. 나란히 전시된
세 점의 드로잉은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경험적 차원이
얽혀 있는 고인돌의 세 가지 현실을 보여준다.
2023년에 제작한 〈국보 530점〉은
남한과 북한의 국보를 한데 모아 그린 그림이다. 국보 번호에 따라 제일 왼쪽 위부터 남한과 북한의 국보가
번갈아 가며 그려져 있다. 그림의 하단이 듬성듬성한 이유는 북한의 국보유적 수가 남한의 국보보다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북한 국보의 유래는 1933년 일제가 지정한 조선의 보물 목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그림 속 유물 대부분은 분단되기 전까지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문화유산으로 통합되었으나 해방 이후 분단을 겪으면서
남과 북이 각자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게 됨에 따라 하나였던 목록이 둘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나눠진 목록을
다시 합침으로써 식민주의와 분단의 이데올로기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오고 나누게 되었는지를 상기시킨다. 또한
작가는 국보였다가 여러 이유로 지정 해제된 유물들의 존재를 그림 상단의 빈칸으로 드러내며 국보를 지정하는 기준과 그 기준이 반영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갈라 포라스-김은 오늘날 박물관과 수장고에 진공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유물에 깃들어 있는 고대인들의 염원과 전통을 현대의
제도와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 작가는 사물과 인간의 유해, 먼지, 박테리아, 곰팡이 등 비인간 개체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서구의
인식론과 식민지적 프로젝트의 인간 중심적 태도에 도전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은 기존의 보존 행위와
제도 등에 물음표를 던지며 사람과 유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제 관심사는 무한정한 기능을 수행해야 할 역사적 유물의 본래 모습이
어떻게 소장처의 보존 방식과 충돌하는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방법론들이 어째서 때때로 그 본연의 목적에 반하는 순간이 생기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박물관의 유물 소장과 같은 ‘동시대의 개입’은 과거 자체보다는 사람들의 동기, 사람과 유물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갈라
포라스-김, “올해의 작가상 2023” 인터뷰)
갈라 포라스-김은 LA와 런던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그는 MUAC(멕시코시티),
Kadist(파리), 아만트 재단(뉴욕), Gastworks(런던)과
CAMSTL(세인트루이스)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휘트니 비엔날레(2019)와 우랄 산업 비엔날레(2019),
광주 비엔날레(2021), 상 파울로 비엔날레(2021),
제주 비엔날레(2022-2023), 리버풀 비엔날레(2022-2023)
등에 참여하였다.
작가는 2019년 하버드 대학교 래드 클리프 연구소의 펠로우를 하였으며, 게티
리서치 센터(2022-2022)의 아트 레지던시에 참여하였다. 또한, 예일 미술대학 조각 학과의 시니어 크리틱으로 재직하고 있다.
References
- 갈라 포라스-김, Gala Porras-Kim (Artist Website)
- 올해의 작가상 2023, 만물: 갈라 포라스-김의 작업에 대하여 - 시아오유 웡 (Korea Artist Prize 2023, The Ten Thousand Things: on the Practice of Gala Porras-Kim - Xiaoyu Weng)
- 월간미술, 갈라 포라스-김: 다중적 시선 - 임수영
- 제13회 광주비엔날레, 갈라 포라스-김 - 우리를 구속하는 장소로부터의 영원한 도피 (13th Gwangju Biennale, Gala Porras-Kim - A terminal escape from the place that binds us)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Korea Artist Prize 2023)
- 리움미술관, 갈라 포라스-김: 국보 (Leeum Museum of Art, Gala Porras-Kim: National Treasures)
-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 인터뷰 2편. 갈라 포라스-김, 전소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