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택 작가는 조선의 책거리 그림에서 발견한 현대적 요소에 매료되어 ‘서재’ 연작을 시작했다. 책장과 서적으로 채워진 공간을 표현한 ‘서재’ 연작은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 갇힌 세계와 무한의 세계, 동양과 서양, 개인의 서사와 인류의 문명, 수직과 수평, 하늘과 땅 등 서로 대비되는 대상과 함께 다양한 공간적 요소를 표현한다.


Exhibition view of Yooyun Yang's solo exhibition at the Amado Art Space/Lab, Seoul. (September 6 -September 29, 2019). Courtesy of the Amado Art Space/Lab.

1980대 말에서 1990년대 초 한국 미술계는 단색화 계열과 민중 미술로 양분되어 있었다. 한국 미대 교수들은 단색화와 같은 추상 계열의 미술을 가르쳤고, 거리에는 사회 변혁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런 미술계 풍토에 편입되길 원하지 않던 작가들은 뒤에서 새로운 미술 흐름을 찾고자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각자만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 시절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한 작가 중 한 명이 홍경택 작가이다. 홍경택 작가는 2007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연필 I’이라는 작품이 최고가에 낙찰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많은 국내 언론 매체에서 홍경택 작가를 최고가 낙찰을 달성한 작가로 소개해 왔다. 하지만 최고 낙찰가 작가라는 타이틀에 빠져 다종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경택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색화나 민중 미술 운동과는 다른 길을 모색하던 홍경택 작가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물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가정용 인터넷이라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 한국 미대생들은 새로운 정보를 접하기 위해 다양한 책을 펼쳐 놓고 판매하는 노점을 이용했다. 그리고 홍경택 작가는 대학교 1학년 시절 우연히 한 노점에 놓인 “이조의 민화(李朝の民畵)”라는 책을 보게 된다. 그는 거기에 나오는 조선의 책가도(冊架圖), 우리말로 ‘책거리 그림’에 매료되었다.


Yi Eungrok, 'Scholar's books and things,' Created: between circa 1860 and circa 1874. Courtesy of the Asian Art Museum San Franscisco .

당시 홍경택 작가에게 있어서 조선 시대 책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특히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과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이 독특했다. 책거리 그림에는 보는 사람과 가까운 대상은 좁게, 먼 대은 넓게 묘사하는 역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한 화면 안에 여러 시점을 넣은 다시점적으로 입체감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책거리는 중국의 장식장 ‘다보각경(多寶格景)’을 표한 것으로, 진열장에 놓인 여러 귀중품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리고 다보각경은 서양 르네상스 시대의 진기한 사물을 전시하는 공간인 ‘호기심의 방’에 영향을 받았다.

조선 시대의 책거리는 서양 화법인 명암법과 더불어 원근투시법적 요소를 수용한 양식을 보이기도 다. 이러한 책거리는 조선 시대 정조 때 크게 유행했다. 이후 19-20세기 민간에까지 계속 인기를 끌며 일반 대중 사이에서 널리 퍼진 양식이 되었다.

홍경택 작가는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그림 양식인 조선 책거리에 영감을 받아 ‘서재’ 연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으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서재’ 연작에서는 책장을 통해 표현하는 공간적, 시간적 요소가 돋보인다.


Hong Kyoungtack (홍경택), ‘Library-Mt. Everest (서재 - 에베레스트산),’ 2014, Acrylic and oil on linen, 194x259 cm.

홍경택 작가의 ‘서재’ 연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밀폐된 공간의 묘사이다. ‘서재’ 연작에는 방 한가득 채워진 책장 안에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그 책들이 마치 쏟아져 내리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때로는 실내에서 바라본 어떤 풍경의 모습이 담겨 있지만 그마저도 어딘가 꽉 차 보이기도 한다.

작가가 묘사한 서재는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으로 보이지만 내재된 관념적 세계는 무한히 확장되어 있다. ‘서재’ 연작에서는 ‘서재’라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공간에서 비이성적이면서도 판타지적 상황들이 펼쳐진다. 홍경택 작가가 표현하는 서재의 공간은 동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옛 선조들이 동굴 벽에 사냥하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이것이 실제 상황과 연결된다고 믿었듯, 또는 우리가 밀폐된 영화관에서 새로운 세계를 엿보듯, 작가는 갇힌 공간에서 환상의 세계가 무한히 펼쳐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나아가 책은 인류의 지식과 문화,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가 집적되어 있는 물건이다. 또한 과거에 쓰여진 책이라도 미래 세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 따라서 책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저마다 독특한 색을 가진 그림 속 책들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최근 작가가 ‘서재’ 연작에서 영감을 받아 시도하기 시작한, 한 권의 책을 그린 작품들이다.

작품 속 책은 동물이나 사물을 관통하고 있어 마치 책이 이들을 결박한 것처럼 보인다. 책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거대 서사가 담겨 있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개별적 삶의 서사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개인의 세계 안에 갇혀 살듯, 그림 속 책들은 무한한 세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개인의 삶에 내재된 한계와 억압을 드러낸다.


Hong Kyoungtack (홍경택), ‘Library – Paradise(서재 - 낙원), 2016, Oil on linen, 162x130 cm.

홍경택 작가의 작품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감상한다면 구상 회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직선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책의 형태와 각 면의 색채가 어우러져 추상적 요소가 가미된 색면 회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책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네모 모양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생각하기에 사각형은 인간과 세상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도 완벽한 형태이다. 원 또한 완벽한 형태라고 불린다. 하지만 원은 어딘지 불안정한 심리를 일으킨다. 또한 원은 하늘과 신을 상징하지만 인류는 오랫동안 지구가 평평하며 네모나다고 믿었듯 사각형은 인간과 지구를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사각형은 종과 획으로 이뤄진 안정적인 형태이며, 사각형을 구성하는 수직과 수평은 신과 인간 모두를 아우른다.

홍경택 작가의 회화 작품들 작가의 내면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중문화와 고전,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종과 획 등이 대표적이다. ‘서재’ 연작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홍경택 작가의 ‘서재’ 연작은 이질적이면서도 서로 대비되는 대상을 동시에 담은 하나의 공간이다.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 갇힌 세계와 무한의 세계, 동양과 서양, 개인의 서사와 인류의 문명, 수직과 수평, 하늘과 땅, 구상과 추상 등 작가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에 모두 담긴 연작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