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b. 1971)는 한국의 근대화 시기에 국가의 주도로 구축된 도시의 발전과 쇠락의 과정을 회화로써 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야경, 도시 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역, 새로 세워진 건물 등 도시의 풍경을 장기간 면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세밀하게 옮긴다.


정재호, 〈청운동 기념비 1〉, 2004 ©정재호

정재호는 2001년 첫 개인전에서 서울의 야경을 조감적 시선으로 담은 풍경화를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그의 화폭에 도시 풍경을 꾸준히 담아 왔다. 그리고 2004년부터 작가는 1960-1970년대 구축된 오래된 아파트와 주택, 빌딩 등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청운동 기념비〉(2004) 시리즈는 작가가 처음으로 선보인 아파트 작업으로, 종로구에 위치한 청운시민아파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곳에서 정재호는 낡은 아파트의 외관과 함께 재개발로 인해 건물에서 살다가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정재호, 〈청운동 기념비 3〉, 2004 ©정재호

정재호는 아파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사람들의 자취를 마치 기록하듯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한지와 먹을 재료로 활용함으로써 동양화의 깊고 바랜 듯한 느낌을 통해 존재하지만 곧 사라질 건물의 희미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이와 함께 서양화의 재료인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벽면의 오래된 얼룩과 찌든 때의 질감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정재호, 〈리버사이드 호텔 - 중산시범아파트〉, 2005 ©정재호

〈청운동 기념비〉를 시작으로, 작가는 건축사와 도시사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거쳐 서울의 여러 시민아파트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작가는 2005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오래된 아파트”전에서 그간의 결과물을 선보였다.

당시 전시에서 선보였던 새로운 아파트 작업들은 건물의 입면을 거대한 크기의 화면과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이전과 달라진 어조를 드러냈다. 가령, 〈리버사이드 호텔 - 중산시범아파트〉(2005) 시리즈는 가로로 길게 이어진 아파트의 정면 외관을 가로 화면에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이는 이전의 아파트 작업에 적용된 사선적인 구도나 배경을 담는 방식과 구별된다.

정재호, 〈리버사이드 호텔 - 중산시범아파트〉, 2005-2014, “아파트 인생” 전시 전경(서울역사박물관, 2014) ©서울신문

이처럼 정재호는 근대화의 상징인 아파트를 회화로 재현하면서,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 번영과 발전을 거듭한 도시 풍경의 이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개발의 논리로 인해 사라져온 낡은 아파트를 기념하고 기록하고자 그의 회화를 일종의 종이 기념비로 상정한다. 나아가 2005년부터 그의 종이 기념비 작업은 부조 또는 입체 형식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정재호의 오래된 아파트 작업은 작가의 개인적 기억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아파트 작업을 이어오며, 작가는 자신의 유년기를 보냈던 옛 아파트를 떠올렸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여러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작가가 마주한 풍경은 자신의 과거이자 그가 알고 있는 이들의 현재였으며 또 그들의 미래이기도 했다.


정재호, 〈현대 오락장〉, 2007 ©정재호

한편 2007년 관훈갤러리에서 첫 선보인 〈황홀한 건축〉(2006-2007) 시리즈는 서울의 근대화 시기 지어진 수십 년 된 낡은 ‘정동의 빌딩’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곧 역사 속에서 사라질 건물들이 갖고 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부터 느낀 황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황홀한 건축〉이 보여주는 4개의 빌딩(청계타워, 현대오락장, 종로빌딩, 용산병원)은 현실의 건물을 토대로 작가의 세밀한 시선과 붓터치로 정교하게 다시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 오락장〉(2007)의 건물 전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땡땡이 무늬는 작가에 의해 임의로 채워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도심 속 건물들을 오랜 시간 관찰하며 교감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건물과의 ‘인연’을 다양한 방식을 통해 표현한다.


정재호, 〈돔1〉, 2009 ©갤러리현대

이후 정재호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될 오래된 건물들을 다루었던 지난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버지의 날〉(2009) 시리즈를 선보였다. 〈아버지의 날〉은 더 나아가 그의 아버지 세대의 역사 속에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사라진 공간과 사물을 재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제는 사라진 1950년대에서 1980년대의 옛 건물들의 이미지를 참고하여 이를 그림으로 재창조하기로 했다. 이때 작가는 있는 그대로 복원해내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 건물들이 존재했던 시공간에 대한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한 편집과 재구성을 거쳐 모호한 가상의 시공간을 그려냈다.

정재호, 〈4월〉, 2011 ©갤러리 소소

2011년 갤러리 소소에서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혹성〉 시리즈 또한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를 차용한다. 당시 정재호는 전후 재건을 위해 온 나라가 경제적 부흥에 힘을 쏟았던 1960년대 한국의 풍경을 찾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공식적인 기록사진부터 기업의 홍보용 사진, 광고이미지, 주한미군이 사적 기록으로 남긴 사진, 대한 늬우스 등의 영상물을 비롯한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렇게 찾은 이미지들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었던 세운상가, 설립 당시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모습, 의수상점의 쇼윈도, 과학전람회에 전시된 우주인 모형 등 기업의 경제적 활동의 흔적과 서구에 의존했던 당시 국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정재호, 〈밝은 미래〉, 2011 ©갤러리소소

정재호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시공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이미지들을 결합하고 배열하거나, 또는 그 풍경을 낡거나 폐허의 이미지로 변형시켜 제시했다. 또한 본래 흑백 사진이었던 이미지에 색을 입히고 회화적 질감을 부여했다. 이러한 작가의 변형과 개입은 그러한 역사가 정지된 시공간이 아니라 오늘날을 뒷받침하고 영향을 미치는, 그렇기에 간과할 수 없는 과거임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정재호, 〈청춘〉, 2012 ©갤러리현대

이와 같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정재호의 회화 작업은 ‘아카이브 회화’라고도 불린다. 그의 아카이브 회화 시리즈는 오래된 건물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그러한 건물들이 세워진 시기의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청춘〉(2012)은 1970년대 후반 장발족 단속에 걸려 이발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을 담은 한 장의 흑백사진에서 출발한다. 그의 그림에서 네 명의 청년들은 우주 헬멧을 쓰고 달 표면에 서 있다. 작가는 이처럼 전혀 다른 맥락을 교차시킴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시기의 모습을 하나의 파편처럼 보여주고 있다.

정재호, 〈난장이의 공〉, 2018 ©국립현대미술관

일련의 아카이브 회화 작업 이후, 작가는 국가가 개발도상국의 국민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뤄낼 밝은 미래를 모두가 꿈꾸도록 ‘권장’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러한 주제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올해의 작가상 2018” 전시에서 선보였던 〈난장이의 공〉(2018)은, 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지어진 세운상가에서 내려다 본 서울 시내 풍경을 담고 있다.

당시 세운상가는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자본주의 산업화의 상징물이었다. 세운상가를 축으로 늘어선 청계천의 상가들과 건물들은 오늘날 거대한 빌딩 사이에서 난장이가 되어버렸다. 정재호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심장부에 존재하는 폐허 같은 풍경을 화폭에 담은 동시에, 중앙 상단에 비현실적인 ‘로켓’을 그려 넣었다.

화면 속 하늘로 쏘아진 로켓은 오늘날 현실에서 매개될 수 없는 집단의 꿈을 상징한다. 이 풍경이 재현하는 것은 단순히 서울 거리의 풍경이 아닌, 경제성장이 멈추고 경제 위기를 겪은 이후 불가능한 것을 꿈꾸던 시대에서 가능한 것을 꿈꾸는 시대로 전환된 한국 사회에 대한 초상이라 할 수 있다.


정재호, 〈소리를 듣는 곳〉, 2020 ©상업화랑

이처럼 정재호는 현재에 녹아 있는 과거의 연속성을 우리 사회의 풍경 속에서 발견하고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써 기록해 왔다. 그의 작업은 과거 사건들과 건물, 사물, 인물을 담아내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그것이 지금의 현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딱히 (그리는 대상이) 정해져 있기보다는 그야말로 ‘그 무엇’이, 단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어찌 보면 무한성 같은 것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에 가깝다” (정재호, 작가 노트)

정재호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정재호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학부 및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세종대학교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된 바 있으며, 개인전으로는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초이앤초이 갤러리, 2023), “창과 더미”(상업화랑, 2020), “열섬”(인디프레스, 2017), “혹성”(갤러리 소소, 2011), “이버지의 날”(갤러리현대, 2009) 등이 있다.

또한 정재호는 OCI미술관(2017), 청주시립미술관(2016), 일민미술관(2015), 아르코미술관(2014),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4)을 비롯한 다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금호미술관, OCI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