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진(b. 1978)은 벌레나 알약, 손톱 등 주변에 버려진 작은 오브제 및 합성점토를 이용하여 정교한 초소형 조각을 만들어 왔다. 작가는 흔히 미술적 재료로 쓰이지 않는, 일상 속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여러 사물들을 재료로 하여 자신이 경험한 세상의 모습을 즉흥적이고 유희적으로 조각 작품에 담아낸다.

그러한 과정에서 함진은 독특한 내러티브와 상상력을 덧붙여가며 초소형 조각 기법으로 창조한 군상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우주를 선보이고 있다.

“공상일기”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1999)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각종 오브제를 사용해 제작된 함진의 조각은 손톱만큼이나 작다. 육안으로는 다 보기 힘든 그의 초소형 조각들은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풍부한 디테일과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 응축되어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함진의 초소형 조각 세계는 고무찰흙 놀이를 하던 작가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손으로 찰흙을 만져가며 작은 존재들을 만들어내 왔다.

“공상일기”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1999)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함진은 대학교 4학년이던 1999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주최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개인전 “공상일기”에서 선보인 직접 손으로 빚어낸 인형들의 소왕국은 그의 어린 시절 고무찰흙 놀이에 대한 ‘재미’와 ‘집착’을 동시에 드러낸다.

작가는 신체 부위들을 결합시켜 만든 찰흙인형 시리즈, 멸치나 번데기 등을 이용한 곤충 시리즈, 장난감의 작은 조각들을 부수고 재구성한 장난감 시리즈를 전시장 구조물과 틈새에 설치했다. 아주 작은 사이즈의 작품들을 관람하기 위해 관객들은 곳곳에 숨겨진 인형들을 찾아내는 또 다른 ‘놀이’에 개입된다.


함진, 〈애완(愛玩) #1015〉, 2004 ©PKM 갤러리

이처럼 함진은 박제된 작은 곤충이나, 음식 쓰레기, 손톱, 각질 등을 재료로 캐릭터화한 초소형 조각들을 실제의 공간 속 일부분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소우주를 현실 세계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2004년부터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초소형 조각들의 세계를 연출을 통해 더욱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2004년 PKM 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으로 선보인 그의 〈애완(愛玩)〉 시리즈는 현대 사회에서 점점 폐소공포적이며 편집증적으로 변해가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초소형 인체 조각이 배꼽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을 연출하여 촬영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현대인의 고립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애완동물과 같이 변해버린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함진, 〈애완(愛玩) #3〉, 2004 ©PKM 갤러리

한편 〈애완(愛玩) #3〉(2004)은 작은 소년이 자신의 몸만한 파리와 꽃 위에서 포옹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애완(愛玩)〉 시리즈는 함진의 그로테스크한 풍자를 넘어, 애완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사랑하며 놀다’라는 개념을 이율배반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고독하게 ‘사랑하며 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함진, 〈애완(愛玩)〉, 2005, “200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전경 ©톱클래스

이듬해인 2005년, 함진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초청되어 〈애완(愛玩)〉 시리즈를 새롭게선보이기도 했다. 당시 작가는 한국관 발코니 턱에 돋보기로 관찰할 수 있는 자그마한 조각들을 설치했다. 그는 한국관이라는 상징성이 강한 공간 안에서 초소형 인물 조각들이 나뭇잎 집을 짓고 생활하도록 함으로써 한국관이라는 공간에 의외성을 부여했다.


함진, 〈폭탄 위의 도시〉, 2008 ©톱클래스

작은 조각들의 세계 속에 응축된 작가의 기발하고 적나라한 상상력은 사물 또는 주변 환경 속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애완(愛玩)〉 시리즈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면, 2008년에 발표한 〈폭탄 위의 도시〉는 불안정한 도시 위에 살아가는 작고 허약한 인간 군상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담고 있다.

〈폭탄 위의 도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매향리 미 공군사격장에서 주워 온 불발탄을 작은 인간 군상의 도시로 만들어 놓은 설치 작업이다. 이 안에는 이끼와 같은 미세한 형태들과 함께 점토로 만든 콘크리트 건물들, 그리고 ‘롯데리아’, ‘나이키’, ‘아디다스’ 등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하는 기업들의 이름이 적힌 피켓이 뒤엉켜 존재한다. 실제 항공 미사일 위에 꾸려진 이 작은 도시는 화려한 자본주의 이면에 내재한 현대 사회의 불안을 축소된 형태로 보여준다.


함진, 〈Untitled 2〉, 2011 ©PKM 갤러리

이러한 함진의 작업들은 작은 크기의 구상 조각들로써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해 왔다면, 2011년부터 선보인 〈Untitled〉 시리즈에서는 검은 점토만을 이용한 반추상의 조각 작품들로써 주변에 대한 작가의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Untitled〉 시리즈의 작고 검은 불분명한 형상들은 서로 뒤엉킨 채 전시 공간을 유영하듯 자유롭게 설치됨으로써 마치 검은색의 추상 드로잉이 입체로 변환되어 공간을 떠도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람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온 정체불명의 생명체, 건물들이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등 작가가 직접 경험한 주변 환경의 모습이나 작가의 다양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이지 않는”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뉴욕, 2013) ©두산아트센터

함진은 사물이 가진 고유한 색으로 인해 드러나는 구상적 구별을 최소화하고 수많은 형태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장치로써 검은색 점토만을 이용했다고 설명한다. 같은 색의 형상들이 뒤엉켜 추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자세히 들여다 봐야만 정교한 형상들이 나타나는 이 작업은 마치 여러 표현이 함축된 하나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함진, 〈안녕〉, 2020 ©챕터투

함진은 〈Untitled〉 시리즈를 기점으로, 특정한 외형을 재현하는 데에서 나아가 형상을 구축하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며 작업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적과 함께 시작된 최근작에서는 작가의 즉흥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색과 형태들이 나타난다.

오로지 검은색의 점토만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Untitled〉 시리즈와 달리, 근작들에서는 다양한 색감이 뒤엉켜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의 색 사용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하기 위함이 아닌 점토를 결합해가는 과정에서 우연적이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감각적 선택에 의한 것이다.


함진, 〈엄마〉, 2022 ©페리지갤러리

또한 함진의 근작에는 이전 작업과 달리 특별한 스토리나 메시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재료의 물성 그 자체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느끼는 감각을 기반으로 형태를 창작하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할 뿐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작품의 형태는 어떠한 이미지로 읽힐 수 있지만, 이는 창작 과정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결과일 뿐이며 애초부터 그 이미지의 창조가 조형 의지의 원동력이라 볼 수는 없다.

획일적인 방향으로 읽히길 거부하는 그의 탈정형적이고 혼종적인 조각은 현실을 포함한 여러 차원의 층위들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작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진 세상에 대한 재인식과 감각의 경험들이 하나로 응축되어 형상화된 그의 작품에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왜 작업하는 걸 즐거워할까 고민해보니 결국 무작위성 때문이더라고요. 뭐가 될지를 모르는 거죠.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 어딘가에 풀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물이 떠오르면 물빛을 가져오기도 하면서 신경계처럼 계속 분열해나가는 과정이 가장 재미있더라고요.” (함진, HEREN 인터뷰, 2016년 1월호)


함진 작가 ©PKM 갤러리

함진은 경원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그는 1999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PKM 갤러리(서울), 아오모리 현대미술센터(아오모리, 일본), 아트앤퍼블릭(제네바, 스위스), 하다 컨템포러리(런던), 두산갤러리(뉴욕, 서울), 챕터투(서울), 페리지갤러리(서울) 등 국내외의 여러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그는 상하이 민생미술관, 런던 유니온 갤러리, 파리 에스파스 루이 비통, 베이징 한국문화원, 서울 로댕갤러리, 후쿠오카 아시안 아트트리엔날레, 파리의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도쿄 모리미술관, 서울 아트선재센터,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서울토탈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서 굵직한 단체전에 참여해왔다. 2005년 5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작가로 선정되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