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b. 1972)는
인간의 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사물과 언어, 자연에 대한 관심을 자신만의 조형적 언어로 표현해
왔다. 그는 일상의 오브제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하여 설치, 조각,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작가는 공예나 민요 등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요소들을
접목시켜 공동체의 삶과 문화를 우리 눈 앞에 놓인 현실과 매개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슬기, 〈이도〉, 2009 ©Adagp Paris
이슬기는 1992년부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대 초 작가는 직접 대안공간 파리 프로젝트룸(Paris
Project Room)을 설립하여 운영하거나, 아프가니스탄의 부르카 의상을 입고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등 적극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실천해 왔다.
그리고 2009년 프랑스 보르도 시에서 진행되는 ‘이벤토’라는 이름의 비엔날레에 초대된 작가는 도시 환경에 주목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주목했던 것은 일시적인 공동체가 형성되는 버스라는 공간이었다.
작가는 버스의 머리 부분에 털 동물을 연상시키는 탈을 씌움으로써 버스 자체를 하나의 움직이는
기념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업 〈이도〉는 마치 미지의 생명체와 같은 모습을 한 채 기존의
노선을 돌아 다니며 도시의 사람들을 싣고 다녔다.
〈이도〉 이후 작가는 ‘탈’이라는 사물에 대한 관심을 이어 오며, 보다 작은 규모로 제작할 수
있는 탈 작업 〈아우성(Clamour)〉 시리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는 직접 색 도화지를 오리고 붙이며 직접 얼굴에 쓸 수 있는 탈을 제작했다. 그렇게 모인 탈들은 다중적 인물의 초상으로 표상된다.
〈아우성(Clamour)〉 시리즈의
탈들은 모두 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그렇지만 탈의 혹 안에 있는 장치로 인해 이를 쓰고 움직이는
순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다. 즉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같은 소리를
냄으로써 새로운 공동체가 정의되고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작업은 관객의
참여가 수반된다. 추상적인 얼굴 모형의 조형물은 관객의 얼굴에 씌워지는 순간 비로소 탈이 되고, 관객의 움직임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써 일종의 ‘시나리오가
없는 공연’으로 변모된다.
이슬기, 〈U: 우물 안 개구리〉, 2018 ©갤러리현대
또 다른 이슬기의 대표작 〈이불
프로젝트 U〉(2014-)는 프랑스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던
중 자연스럽게 갖게 된 한국적인 색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80년대 한국에서 유행하던 알록달록 오방색의 누비이불을 주목했다.
이슬기는 누비이불의 한국적인 색감과 기하학적
패턴, 그리고 이불이라는 사물이 지닌 특수한 장소성에 관심을 가지며 통영의 장인들과 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불 프로젝트 U〉의 기하학적인 패턴들은 한국의 속담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 등 한국의 속담들이 가진 시각적인 속성에 흥미를 느꼈고, 이에 대한
시각적 심상을 패턴으로 치환하여 이불로 제작한다.
〈이불 프로젝트 U〉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공예 장인들과의 협업 프로젝트는 이후 〈바구니 프로젝트 W〉로 이어졌다. 〈바구니 프로젝트 W〉는
멕시코 오악사카 북부 지역의 작은 마을 산타마리아 익스카틀란의 장인들과 협업한 프로젝트로, 그들의 삶과
문화가 담겨 있는 바구니를 예술의 형태로 풀어내어 현재로 소환하는 작업이었다.
이슬기는 멕시코 소수 공동체인
익스카틀란 원주민들이 야자 섬유 수공예 바구니를 짜면서 사용하는 언어 ‘익스카테코’에 주목했다. 익스카테코는 16세기
스페인 침략 이후 사라져 가는 언어로, 현재 익스카틀란 원주민들 중 네 명만이 구사할 수 있었다. 작가는 이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를 작품의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이 시대에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존재를 현재의
위치로 끌어왔다.
이슬기, 〈여인이 섬〉, 2019 ©대안공간 루프
이처럼 이슬기는 공동체의 기억과 문화를 담고 있는 매체로서의 ‘언어’ 또한 관심을 가져 왔다. 이슬기의 〈여인이 섬〉(2019)은
브르타뉴 펭베낭 지역에서 전해지는 여인들의 외설스러운 전통 민요를 차용했다. 작가는 펭베낭 지역에 있는
작은 섬 ‘여인의 섬’에 한달 동안 머물며 전통요를 부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했다.
이슬기는 그러한 과정에서
접한 리네트 장드롱(Linette Gendron)의 ‘프와투
노래(Chansons en Poitou’라는 곡의 가사를 바탕으로 지역의 방언을 섞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었다. 영상 작업 〈여인이 섬〉에는 두 명의 여인들이 ‘여인의
섬’ 곳곳을 누비며 작가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편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에서 선보였던 〈동동다리거리〉(2020)는 한국의 전통 민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공간 설치 작업이다. 제목인 ‘동동다리거리’는
고려시대 민요 ‘동동 (다리)’에 민요 형식인 ‘달걸이’를
연결한 작가만의 신조어다.
작가는 ‘달걸이’라는 단어에서 달을 거는 동작이나 달을 걸기 위한 장치를 떠올린
동시에 읽을 때의 발음 ‘달거리’에서 ‘거리’를 걸어 다니는 바깥 세상과 연결했다.
이러한 언어유희와 연상작용을
바탕으로 한 이 작업은 달이 창호지를 바른 한국 전통 가옥의 문살을 통과하여 방에 마술적 공간을 만드는 작가의 상상에서 출발한다. 이슬기는 단청 장인과 협업하여 달의 회전과 민요의 장단을 문살 구조에 반영한 네 개의 큰 문을 제작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유희적인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전시를 이룬다. 전시장에는 한국의 ‘다리 세기’ 민요가 흘러 나오고,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놀이기구 ‘바기텔’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동동다리거리〉는 과거와 현대를 매개할 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적 장르와 문화적
요소 등이 혼성되어 직조된 형태로 드러난다.
이슬기, 〈느린 물〉, 2021 ©인천아트플랫폼
이슬기는 다음해 인천아트플랫폼에서의 개인전 “느린 물”에서 한국의 전통 문살을 차용한 설치 작업 〈느린 물〉(2021)을 선보였다. 단청 장인들과
협업하여 제작된 〈느린 물〉은 전통적인 기법과 기예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경험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다.
이 작업은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머물 당시 보았던
환영적 감각을 일으키는 ‘빌라 디 리비아(Villa de Livia)의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이슬기는 이 고대
벽화에서 받은 영롱한 물속 경험과 과거 간척지에 위치했던 인천아트플랫폼의 장소성을 연결시켜, 전시 공간에
넓고 느리게 흐르는 물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설치 작업을 제작했다.
이처럼 이슬기는 일상의 사물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순수미술과 공예, 전통과 현대,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들을 직조하여 혼성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작품은 우리 눈 앞에 놓인 현실과 또 다른 세계를 연결 짓는 매개체가 되어 일상 속에서 잊고 있는 것들을 소환하고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필요에 의해 한 모든 활동이 예술입니다. 여전히 예술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요. 호기심으로 사물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직감적, 본능적 활동을 시대와 제도에 짓눌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슬기, 디자인하우스 M+ 인터뷰, 2019년 2월호)
이슬기 작가 ©갤러리현대
이슬기는 서울에서 태어나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1992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며 활동 하고 있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과 SBS가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0”에서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갤러리현대(서울, 2018), 미메시스아트
뮤지엄(파주, 2015), 누아지엘 라 페름 드 뷔송 아트센터(프랑스, 2009), 쌈지스페이스(서울, 2004)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또한 제17회 리옹비엔날레(2024), 제12회 부산비엔날레(2020),
제10회 광주비엔날레(2014), 제3회 파리 라 트리엔날레(프랑스,
2012), 제1회 보르도 비엔날레(프랑스, 2009) 등에 참여하였으며, 대안공간루프(서울, 2021),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 2017), 장식미술박물관(프랑스, 2015), 쿤스트할레 빈(오스트리아, 2007) 등의 기관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초대되기도 했다. 프랑스지역자치단체
현대미술 컬렉션 (FRAC)와 호주 빅토리아국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