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인(b. 1972)은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통해 ‘동등성(equality)’라는
화두를 이끌어내며, 현실의 여러 수직 위계 구조를 유연하게 허무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작가는 동등성이 실험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경계’를 탐구하고자, 드로잉, 회화, 설치, 사운드, 자수, 퍼포먼스, 텍스트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해
오고 있다.
홍영인의 초기 작업들은 특정한 장소들을 기반으로 한 일시적이고 연극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를 테면, 〈기둥들〉(2002)은 전시 공간 안에 커튼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작가가 직접 정교하게 바느질을 하여 만든 이
커튼 기둥은 속이 텅 비어 있음으로써 건물의 하중을 견디는 본래 기둥의 역할이 퇴색되어 있다. 부수적인
장식적 구조물로서 공간 내부를 점유하고 블로킹함으로써 기존 미술관의 공간적 맥락을 교란시킨다.
홍영인, 〈하늘 공연장〉, 2004 ©갤러리 팩토리
그리고 2004년 홍영인은 자신이 직접 기획한 전시 “하늘 공연장”을 통해 일련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작가는 전시 공간 팩토리 갤러리를 거점으로, 그 주변의 우체국과
경찰서 등에 설치 작품을 제작했다. 이는 권위적이고 제한적인 공공기관이라는 맥락에 한시적으로 미술 작품을
개입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여러 장치들로 구성된다.
안국 우체국의 건물을 활용하여 커튼 구조물을 설치했던 작업 〈하늘 공연장〉(2004)은 마치 옥상을 한 층 올리는 공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외관을 연출하는 연극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작가는 아시바 가구조물을 설치한 후
무대 커튼 형태의 붉은 천을 사방에 씌움으로써 우체국 건물을 가짜 공사가 펼쳐지는 하나의 무대로 연출한다. 공적인
공간이자 비-예술적 장소를 새롭게 재맥락화하여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뒤섞는다.
이와 함께 진행한 또 다른 작업 〈나는 영원히 그리고 하루 더 죄를 짓겠습니다〉(2004)의
경우에는 삼청동 파출소를 무대로 삼는다. 이 작업은 작가가 서울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꽃들을
화단에서 캐 오거나, 길 거리의 꽃 화분들을 분별없이 가져오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이후 작가는 훔쳐온 꽃들의 이미지를 자수로 수놓아 기록한 다음 파출소 내부를 장식한다.
즉 〈나는 영원히 그리고
하루 더 죄를 짓겠습니다〉는 평면작업으로 결과물이 보여지되 꽃을 훔치는 일종의 극/퍼포먼스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그리고 죄를 짓는 행위에서 출발한 이 작업은 지역의 안전을 지키는 파출소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안전유지’라는 방어막 속에
놓여진 예술은 경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24시간 관객에게 열려 있는 안전하고 작은
미술관이 된다.
이처럼 홍영인은 장소 특정적인 설치와 연출을 통해 익명의 일반 대중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예술의 경계와 우리의 인식을
뒤흔드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러한 극/퍼포먼스적인 성격의
작업과 함께, 그의 작업 세계를 설명하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으로 바느질과 자수 공예를 활용한 작업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아시아 여성 직공의 저임금 노동인 ‘바느질’과 순수예술에서 배제된 ‘자수 공예’를
활용하여 거대 서사 안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상기시키는 작업을 이어 왔다. 예를 들어, 영화 〈사하린의
하늘과 땅〉(1964)의
포스터에서 영감을 받은 자수 작업 〈행복의 하늘과 땅〉(2013)은 한국 근대화 시기 주요 여성 인물과 노동자의 초상을 담고 있다.
이 작업 안에는 서로 다른 세대, 다양한 사회적 계층, 그리고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의
모습이 자수로 이루어진 포토 몽타주 기법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난다. 이를 통해 홍영인은 남성중심주의 사회
안에서 저평가되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노동의 역사를 저임금 노동으로 치부되었던 바느질을 통해 다시금 조명하고 재구성한다.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존재를 자수로 다시 새기는 그의 작업은 이후 〈Looking Down from
the Sky〉(2017)를 통해 악보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한국의 민중운동 아카이브 사진들을 수집하고, 사진들 속 시위
현수막, 한 데 뭉쳐 목소리를 내는 모습, 그들을 막고자
하는 경찰의 모습 등의 실루엣을 따라 드로잉을 한 다음 자수로 변환했다.
홍영인은 그렇게 모인 자수들의 형태를 악보로 재해석하여, 소외되고
억압된 이들의 목소리를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과 같은
악기들의 선율로써 다시금 울려 퍼지도록 한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참여했던 홍영인은 자수, 설치, 퍼포먼스 등의 매체를 활용하여 전 세계적으로 극대화되어 가는 국가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사유를 풀어냈다. 작가는 이러한 전 지구적으로 일반화된 배타성을 바라보며 대안적인 소통 방식의 가능성이 긴급하다고 여겼고, 이를 인간과 전혀 다른 소통 방식을 가진 동물을 통해 성찰했다.
동물 중에서도 ‘새’를
중심으로 한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2019)은 대형 새장 구조물을 통한 공간 설치 작업과 영상, 사운드, 자수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대형
새장 안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새와 인간의 위치가 반전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이내 유교식
제사에서 조상신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그림으로 표현한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에서 차용한 자수 걸개 그림과 만나게 된다. 작가는 감모여재도의 도상을
바탕으로, 기존의 사당과 제례 도구 등의 이미지를 새의 이미지로 대체하여 표현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전복시켜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영상 작업 〈하얀 가면〉(2019)에서는
즉흥 연주를 통한 인간의 ‘동물-되기’를 수행하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교차점을 모색해 나가기도 했다.
또한 작가는 배타성이나 극단적 타자화가 우리 사회에 잠재적으로 내재된 병리 증상이라고 보며, 다양한 개인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작업 〈비-분열증〉(2019)을
통해 분열 증상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그는 이 작품을 제작하고자 먼저 여성의 저임금 산업 노동, 경제적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사 노동, 젊은 여성이 비정치적 주체로 여겨져 왔던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는 역사 아카이브를
조사했다. 그리고 사진에서 발견한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특정 동작을 새의 불규칙한 움직임과 교차시키는
과정을 거쳐 독특한 안무를 제작했다.
이와 같이 비인간 존재를 통해 인간 사회를 성찰하는 작가의 사유는 〈Thi and Anjan〉(2021)에서도 이어진다. 어느 날 작가는 동물, 인간,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서로 이어져 공존하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오늘날 상실되어 감을 깨닫게 되면서, 무리를 짓고 정서적으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동물 공동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그러한 동물 중에서 코끼리에 주목했다. 그는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코끼리의 생활 및 소통 방식을 관찰하고 소리를 채집했다. 그리고 짚풀 공예 명인들과
협업하여 그 무리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 코끼리 티(Thi)와 손녀 안잔(Anjan)을 위한 짚신을 제작했다.
홍영인은 그렇게 만들어진 코끼리를 위한 짚신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숲, 인도의 전통 결혼식, 동물원 등 인간과 코끼리가 만나는
다양한 장소와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 트랙이 울려 퍼지도록 했다. 작가는 이러한 시청각적인 환경을
구축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감각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홍영인은 예술이라는 유연한 방식을 통하여 거대 서사 아래 가려진 영역 또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귀담고, 씨실과 날실을 교차하듯 이들을 하나의 전시로 엮어내며 수평적인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작업에서 ‘동등성’이 실천되고, 재분배되며, 실험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경계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다. 나에게 ‘동등성’은 단순히 “A는 B와
같다”는 것이 아니라, A와 B 사이의 지각적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그 둘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술과 사회적 공간 사이에 세심하게 설정된 경계를 구성하는 것은 오랫동안 나의 작업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
주제였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이미 익숙하고 받아들여진 사회적 규범을 약간 흔들거나 모호하게 만들고, 고정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제안하는 것이 의도다.” (홍영인, 작가 노트)
영국 브리스톨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홍영인은 서울대학교에서 학·석사를,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 ICA, 주영 한국문화원, 아트선재센터, 아트클럽 1563, 대안공간 루프를 포함,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의 퍼포먼스는 런던 블록 유니버스, 브리스톨 아르놀피니 미술관, 마게이트 터너 현대 미술관 등 세계 유수 공간에서 전개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같은 유수 기관의 단체전과 광주비엔날레, 밀라노
트리엔날레 등의 국제 행사에 출품되었다.
2019년 홍영인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김세중 조각상, 2003년 석남미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영국 바스 미술 대학의 전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ferences
- 홍영인, Young In Hong (Artist Website)
- PKM 갤러리, 홍영인 (PKM Gallery, Young In Hong)
- 올해의 작가상, 홍영인 (Korea Artist Prize, Young In Hong)
- 갤러리 팩토리, 홍영인 – 하늘 공연장 (Gallery Factory, Young In Hong – Open Theater)
- 서울시립미술관, SeMA 옴니버스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 (Seoul Museum of Art, SeMA Omnibus “At the End of the World Split Endlessly”)
- 국립현대미술관, 홍영인 |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 - Ⅳ. 벽그림 | 2019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HONG Youngin | To Paint the Portrait of a Bird - Ⅳ.Wall Tapestry | 2019)
- 국립현대미술관, 홍영인 | 비-분열증 | 2019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HONG Youngin | Un-Splitting | 2019)
- PKM 갤러리, 홍영인: We Where (PKM Gallery, Young In Hong: We W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