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충현(b. 1970)은 우리의 일상 속 익숙한 풍경들을 포착하고
교감하며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써 캔버스 위에 옮겨 왔다. 그는 직접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바라본
풍경을 카메라로 담은 다음 이를 회화라는 매체로 번안한다.
그의 회화는 무덤덤하게 풍경을 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기억 속 어느 한 부분을 건드리거나 정서적
울림을 자아내곤 한다.
노충현, 〈구르는 섬〉, 2005 ©노충현
노충현이 작업을 시작했던 무렵 한국의 회화는 단색화라 부르는 추상회화와 민중미술이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작가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태도로 현실을 마주하는 신세대 구상미술 작가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 작가는
디지털 카메라가 상용화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사진을 활용한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노충현의
작업은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자신이 오가는 곳들을 다시금 바라보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직접 촬영한 사진을 참조하여 풍경을 재현할 때 사진의 이미지는 풍경을 바라보던 당시의 기억과 느낌을 끌어내는 도구로 활용된다.
노충현, 〈계단〉, 2006 ©노충현
2005년부터 지속해온 〈살풍경〉 시리즈는 작가가 오랫동안 오고 갔던 한강시민공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목 ‘살풍경’은 사전적
의미로 ‘몹시 쓸쓸하고 고요한 정경’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구조적이고 엄격하며 밀도가 높은 도심의 풍경과 달리, 한강시민공원은
그러한 도심 속에서도 비어 있거나 한적하며 개방되어 있다.
당시 심리적 소외 상태에
놓여 있던 작가는 그러한 황량한 장소 안에서 메마르고 단조로운 풍경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풍경 안에서의
정서적 경험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덤덤한 태도로 그려낸 그의 그림은 절제된 감정적 거리감을 품고 있다.
노충현, 〈장마〉, 2008 ©노충현
한강시민공원의 인공적 풍경들과 자연적 풍경들은 작가의 회화적 변주를 거침으로써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소로 인식되게 된다. 예를 들어, 비 오는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수영장을 그린 〈장마〉(2008)는 보이는 장면 너머 황량하고 쓸쓸한 그곳의 인상과 여러 심상들이 표상된다.
노충현, 〈유수지의 밤〉, 2013 ©노충현
작가는 이 작품이 애초에 사진과 달리 “부정확한 투시로 장소를 포착하면서
물감은 되도록 얇게 발라 뿌연 흙탕물의 인상을 포착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작품 속 흐릿한 풍경의 질감으로부터 그 자리에서 작가가 느꼈을 정서적이고 시-지각적인 반응이 환기된다. 이와 함께, 그의 회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각각의 장면이 지니는 공간적
정서를 특정한 장소가 지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반추하게 한다.
그리고 2011년경부터 작가는 한강 주변의 계절적 변화를 관찰했다. 십여 년
가까이 보아 온 동일한 장소를 다르게 보게 된 작가는 새로 보인 풍경을 재현하고 그에 따른 정서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노충현, 〈뿔〉, 2006 ©노충현
〈살풍경〉은 도심 ‘사이’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면, 2006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자리〉 시리즈는 동물원이라는 도심 ‘밖’의 풍경을 담고 있다. 작가는 동물이 부재한 텅 빈 우리를 그림으로써 정체성이 모호한, 흡사 근대성이 스쳐 지나간 텅 빈 ‘자리’ 같은 공간을 표현했다.
노충현, 〈서커스〉, 2006 ©노충현
작가는 동물원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인 동물들을 지움으로써 비로소 보이게 되는 공간, 즉 무대 장치에 집중하도록 한다. 동물들이 놀 수 있게 꾸며진 공간은 엉성한 나무기둥들과 같은 인공 자연물 등 임의적이고 어설픈 장치들이 풍경을 이룬다. 노충현이 바라본 이러한 인위적이고 아이러니한 풍경은 그의 회화 속에서 아무런 공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진공상태의 밀폐된 공간으로 그려진다.
노충현, 〈고도를 기다리며〉, 2006 ©노충현
작가는 이 동물원의 무대장치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구조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작가는 이 공간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와 같이, 인간 현실의 단편을 보여주는 풍경이자 인간 삶의 비극과 희극성이 섞여 있는 공간, 적절한 비애감을 느끼는 역설적인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공간의 주체와 무관하게 놓여져
있는 훌라후프, 타이어, 생수통 등의 동물원 속 장치들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등장인물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한 그루의 나무와 겹쳐 보인다. 공간과 사물이 어긋나는 이러한 역설적인 풍경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 보게 한다.
노충현, 〈방〉, 2009 ©노충현
그리고 2009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의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실밀실〉 시리즈는 군사독재시절의 역사적 시간이 지닌 공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업은 작가가 한 명의 개인으로서 지나온 근현대의 정치사회적 역사에 대한 소회를 다루는 동시에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당시 밀실행정이 실천되는
사례들(형무소, 교도소, 용산
참사 현장, 고 박종철 기념관, 옛 안기부건물 등)을 ‘그리기-지우기’를 반복하며 회화로 기록했다. 그리고 작가는 당시 사루비아 공간 중심에
두 개의 시멘트벽을 실험적으로 가설하여, 회화적 주제가 지닌 장소성,
역사성, 공간성과 조우하며 밀실의 주제성을 부각시켰다.
또한 〈실밀실〉은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직접 작가가 방문한 장소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을 참조로 하지만, 이 외에도 작가가 인터넷에서 찾은 밀실적 상황(억압, 규율, 감시체제, 죽음, 폭력 등)을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노충현, 〈복도〉, 2009 ©노충현
작가는 정치, 고문, 폭력, 죽음으로
이어지던 역사의 어두운 현장들을 다루며 현재 그가 서 있는 사회의 단면을 바라본다. 그는 소통 불가능성, 폐쇄성, 일방성과 같은 사회 현상들이 오늘날 보이지 않는 ‘밀실’이 되어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고, 〈실밀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밀실적 상황을 암시하거나 예시하는 징후들을 발견해
나갔다.
그리고 작가는 밀실적
상황과 이에 대한 감정들을 질감으로 담아 냄으로써, 정치적 영역을 넘어 밀실화 되어 가는 현실적 삶의
위기에 대해 암시할 수 있도록 했다.
노충현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느낀 정서적 경험이나 현실의 문제들을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한강시민공원, 동물원, 홍제천 등 멀리 있는 특별한 풍경이
아닌, 일상의 평범한 장소 속에서 인간적인 풍경을 바라보고 교감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의 회화는 건조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삶의 풍경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인간적인 온기를 담고 있다.
“회화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특정한 장소이기보다는 장소에서 보고 느낀 정서에 좀 더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 정서에는 온기가 있다.” (노충현, 작가 노트)
노충현 작가 ©서울아트가이드
노충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스페이스 윌링앤딜링(2020), 페리지갤러리(2017), 갤러리 소소(2015), 국제갤러리(2013)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참여한 주요 그룹전으로는 갤러리 소소(2021), 국립현대미술관(2021), 누크갤러리(2020),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18), 챕터투(2017) 등이 있다. 2010년에는 몽인아트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References
- 노충현, Roh Choong Hyun (Artist Website)
- 국제갤러리, 살풍경 (Kukje Gallery, Prosaic Landscape)
- 국립현대미술관, 노충현 | 장마 | 2008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Roh Choong Hyun | The Rainy Season | 2008)
- 페리지갤러리, 자리 (Perigee Gallery, Zari)
- 아트 인 컬처, 이추영: 그 곳의 빈 자리, 2006년 6월호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실밀실 (Project Space Sarubia, Closed-door Room)
- 챕터투, 노충현 (Chapter II, Roh Choong 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