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b. 1981)는 재료의 본질에 관한 연구와 함께 자연환경에 대한 인류의 태도, 그리고 미신으로 일컬어지는 옛 문화 등을 지금의 과학기술 및 철학과 연관시키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의 작업은 재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특정 관심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스스로의 손으로 수행하는 과정들을 거치면서 시각화해 나가는 작업 방식으로 구축된다.


백정기, 〈Untitled (Vaseline Armor)〉, 2007 ©백정기

백정기의 초기 작업은 유년기에 겪은 화재사고로 인한 상처에서 비롯된다. 바셀린(Vaseline)을 피부 위에 두껍게 발라 투구와 갑옷의 형태를 만든 〈Vaseline Armor〉(2007) 시리즈와 건물의 갈라진 틈에 바셀린을 채워 넣는 설치작업 〈Treatment〉(2008)는 작가의 삶 속에서 일반 상비약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바셀린의 ‘보호와 치유적 의미’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또한 작가는 색슨어 ‘바소르(wassor: 물)’와 그리스어 ‘오레온(oleon: 기름)’을 합하여 만들어진 바셀린의 어원에 주목했다. 물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고체 기름인 바셀린은 피부에 바를 경우 기름막을 형성해 피부 안쪽의 수분이 날라가는 것을 막아준다. 이러한 바셀린의 특징은 작가의 작업에서 ‘물의 치유적 의미’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종종 이용된다.

백정기, 〈기우제: 카이로〉, 2008 ©백정기

2008년부터 시작된 백정기의 〈기우제〉 시리즈는 바셀린 연작에서부터 이어진 ‘물의 치유적 의미’에 대한 예술적 실험을 비를 부르는 의식인 ‘기우제’의 방법론으로써 구체화한 퍼포먼스 영상 작업이다.
 
백정기는 환경연구서 『Environment, Scarcity, and Violence』(2001)의 저자 Thomas F . Homer-Dixon이 물 부족과 같은 환경적 결핍이 폭력과 갈등을 유발한다는 주장에 착안하여, 스스로 샤먼을 자처해 물이 부족한 지역들이 역사적으로 겪어온 사회정치적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기우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백정기, 〈기우제: 마하미드〉, 2008 ©백정기

그 중, 〈기우제: 마하미드〉(2008)는 모로코의 사막화가 진행되는 대표적인 장소인 마하미드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여기서 작가는 동서양의 샤머니즘에서 나타나는 기존의 제의적 요소들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물, 보습, 바셀린 그리고 치유’에 관한 작가의 경험적인 메타포와 접목시키며 기우제를 진행했다.
 
그는 조선시대 기우제에 쓰인 도롱뇽을 왁스와 바셀린으로 만들어 열에 녹이고 다시 다른 형태로 전환시키거나 바셀린을 돌이나 땅에 바르는 일련의 의식을 진행했다. 또한 서양의 연금술에서 사용되는 네 가지 원소(물, 불, 공기, 대지)와 삼각형을 차용하여 그 모형을 물의 방향으로 놓은 뒤 땅속에 묻는 의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백정기, 〈기우제〉, 2015, “MIND WALK”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15) ©백정기

이후 그의 기우제 작업은 2015년 두산갤러리에서의 개인전 “MIND WALK”에서 양극화된 사회의 통합을 기원하는 기도로써 이용된다. 작가는 생각이 매몰되어 이념이 수축되고 양극화되는 과정을 오랜 가뭄에 땅이 갈라지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전시에서 작가는 유감주술(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발생시키고, 결과는 원인과 유사하다는 원리)을 통한 기우제로 양극화된 사회의 균열의 틈새에 이해와 관용 그리고 통섭을 채워 넣는 의식을 진행했다.


백정기, 〈기우제〉, 2015, “MIND WALK”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15) ©백정기

작가는 갤러리 벽면에 점토를 바르고 건조시킨 후, 갈라진 틈에 바셀린을 채웠다. 그리고 점토를 굳히고 갈라지게 함으로써, 메마른 대지와 유사하게 만들고, 그 메마른 점토에 물을 뿌림으로써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물을 재료로 하지 않고 고체 기름인 바셀린을 사용한 것 또한 유감주술로써 작동한다. 예부터 샤먼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해 무구로 사용했듯이, 작가는 보습에 이용되는 바셀린을 유감주술로써 이용하여 사회의 통합을 기원하는 기우제의 재료로 상정한 것이다.


백정기, 〈단비〉, 2010, 인사미술공간 전시 전경 ©백정기

한편 2010년 인사아트공간 지하 전시장에서 선보였던 관객 참여형 설치작업 〈단비〉는 ‘단비’라는 관념적 대상을 실제화하는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실내 공간인 전시장 내부에 단맛을 내는 합성감미료 사카린을 넣어 만든 단비를 내리게 하고, 우비를 입은 관객이 그 안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단비를 맞고 또 맛볼 수 있게 했다.


백정기, 〈단비〉, 2010, 단비 급수 시스템 설계도 ©백정기

‘단비’라는 단어는 실제로 단맛이 나는 비라는 의미로 쓰이기 보다는 꼭 필요한 시기에 맞춰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러한 의미와 함께 단어 자체에 들어간 ‘달다’라는 형용사가 연상시키는 미각적 감각에 주목하며 단비의 관념을 감각적으로 치환하고자 했다.  
 
작가는 이를 위해 건물 2층 수조에서 나온 물이 사카린과 섞이도록 중간 장치를 설계하고, 그 단물을 흘려 보내는 펌프와 배관, 그리고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도록 만든 버튼과 배출 장치 등을 고안했다. 그의 예술적 상상력은 이러한 과학적 탐구와 방법론을 기초로 현실화된다. 작가의 상상이 현실이 된 공간 안에서 관객은 직접 몸을 통한 감각적 경험으로써 유쾌한 치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백정기, 〈파상운〉, 2014,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백정기

갈등을 해소하는 정신적 치유로서의 물과 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파상운〉(2014)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이 작업에서는 비가 내리는 소리와 천둥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치가 기우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등장한다.
 
실제로 아즈텍 문명에 뿌리를 둔 샤머니즘에서는 빗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기우제에서 연주했다고 전해진다. 작가는 이러한 악기에 착안하여 장치를 제작하고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비와 바람 그리고 천둥번개로 이어지는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백정기, 〈파상운〉, 2014,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백정기

이 사운드는 라디오 전파의 형태로 안테나를 통해 전시장 외부로 송출된다. 그리고 이러한 라디오 전파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멀리 보낼 수 있도록 이용되는 송출기와 증폭기는 전시장에 놓인 촛불의 미세한 열원을 전기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장치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게 된다.
 
관객의 참여로 촛불 발전기에 놓인 촛불의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송출되는 전파의 세기는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비와 바람 그리고 번개소리가 담긴 라디오 전파는 더욱 강하게 뻗어나가게 된다. 거대한 안테나를 통해 송출된 전파는 전시장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곳곳에 스며들며, 또 다른 야외공간에 설치된 라디오를 통해 관객은 비와 바람 그리고 천둥소리를 듣게 된다.

백정기, 〈능동적인 조각: 전태일〉, 2023, ”올인원”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아라리오갤러리

2023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올인원”에서 선보인 안테나를 이용한 또 다른 사운드 설치작업 〈능동적인 조각〉(2023) 시리즈는 실제 인물에 대한 기념비적 동상을 제작하여 사운드를 입히는 작업이었다.
 
이는 작가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중인 〈메모리얼 안테나〉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메모리얼 안테나〉는 역사적, 정치적 혹은 종교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실제 동상이나 기념비를 단파 라디오를 받아들이기 위한 안테나로 이용하는 작업이다.  


백정기, 〈메모리얼 안테나: 얀 3세 소비에스키〉, 2011 ©백정기

〈메모리얼 안테나〉는 기존에 존재하는 금속으로 제작된 야외 기념비의 물질적 속성을 그대로 이용한 작업이라면, 〈능동적인 조각〉은 실제 동상들을 3D 스캐닝해 외형성을 갖추되 상상력을 더해 조금씩 변형된 모습의 안테나 동상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능동적인 조각〉의 동상들은 미스터리한 소설을 낭독하는 목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첼로 연주를 라디오 전파로 송신하고, 관객들은 갤러리 곳곳에 놓인 라디오를 통해 이 새로운 전자기적 파동과 언어를 듣게 된다. 백정기는 동상을 안테나로 활용하여 잠재된 사운드를 가시화함으로써, 동상의 외형이 가진 의미나 상징 대신 재료의 물질성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백정기, 〈Is of: 설악산-01〉, 2023 ©아라리오갤러리

백정기의 또 다른 대표작 〈Is of〉(2011-) 시리즈는 자연풍경을 담은 사진들로 구성된다. 마치 색이 바랜 오래된 풍경 사진처럼 보이지만, 이 사진들은 사진에 담긴 장소들에서 찾은 단풍잎, 녹차잎 등 자연물로부터 추출된 색소를 이용하여 프린트한 결과물이다. 이렇게 실제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색소는 기성잉크로 프린트한 것에 비해 색의 재현이 정확하지 않고, 빛이나 산소에 노출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색이 바래진다.


“Is of” 전시 전경(대안공간 루프, 2012) ©백정기

자연의 성분으로 작품을 만들면서 백정기는 자연의 본질과 속성, 생성과 소멸이라는 변화의 개념을 시각적인 결과물로 보여준다. 2017년부터는 보존을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그 결과 투명 레진을 이용해 사진 전체를 앞뒤로 감싸는 함침법을 적용한 사진작업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시간을 정지시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행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주변 사물과 현상에 대한 백정기의 지속적인 탐구는 과거부터 형성된 물질에 대한 인간의 믿음 혹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예술적인 상상력과 과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작업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현대와 전통, 과학과 종교, 물질과 정신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상반된 주제들을 물질의 자연적 속성을 이용하여 융합시키거나 연결시킨다.

“작품을 통해 자연의 본질을 환기시키고, 우리의 관념을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백정기, 경향신문, 2010.08.02)

백정기 작가 ©인테리어디자인코리아

백정기는 국민대학교에서 입체미술을 전공한 후 영국 글라스고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였다. 2006년부터 2023년까지 대안공간루프, OCI 미술관 등에서 12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2004년부터 현재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송은, 리움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포스코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의 기획전에 다수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영국, 이탈리아, 미국, 베네수엘라, 이스라엘, 중국, 싱가포르, 홍콩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하였다. 2012년 송은미술대상, 2019년 김세중 청년조각상, 2023년 홍콩아트센터 IFVA 미디어아트 금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