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는 올해 ‘프리즈 뉴욕 2024 Frieze New York 2024’에서 현대미술가 양혜규가 2021년부터 제작해 온 종이 콜라주 연작인 〈황홀망恍惚網〉을 집중 조명하는 솔로 부스를 선보인다.
이번 기획은 세계 무대에서 주로 조각가로서 인식되어 온 양혜규가 평면 매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지대한 관심에 기반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1년간 한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무속 전통에 사용되는 다양한 종이 무구(巫具)에 대한 연구를 마침내 개시했고, 그 과정에서 도출한 12점의 작품을 2021년 8월 국제갤러리 서울점에서 프레젠테이션 형식의 소규모 전시 “황홀망”을 통해 최초 공개했다.
영(靈)적인 행위와 민속적인 의식에 관련된 종이 공예 전통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인류학적 탐구는 미시적 역사 흐름을 구성했고, 이는 〈황홀망〉 연작의 근간이 되었다. 현재까지 총 세 권의 소책자가 종이 무구를 둘러싼 작가의 궤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행사는 현재 진행중인 〈황홀망〉 연작을 북미 관객에게 처음으로 본격 소개하는 자리로 종이의 물성을 향한 양혜규의 고유한 여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이어져온 양혜규의 방대한 작업세계를 관통한다. 작가는 〈황홀망〉 연작에서 종이라는 미미한 물질에 영혼을 불어넣는 무속적 행위를 실험하며 이러한 관심을 전면에 드러낸다. 본 연작은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를 비롯해 이와 유사한 일본의 화지(和紙), 중국의 추피지(楮皮紙) 등 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뽕나무를 재료로 한 종이의 제의적 사용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새로운 소재의 활용은 다양한 문명에 걸쳐 시행되어온 치유, 퇴마, 정화 의식에 사용된 종이 무구에 대한 작가의 포괄적인 연구로 이어진 바 있다. 작가는 한지를 접고, 자르고, 뚫는 방식으로 재료에 영적인 욕망과 중보적 의도를 불어넣음으로써 솔 르윗(Sol LeWitt)이 ‘개념 미술에 관한 문장(Sentences on Conceptual Art)’(1968)에서 언급했던 ‘신비주의적 도약(mystical leaps)’이라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채택한다.
양혜규의 주요 시각적 레퍼토리는 한국의 무속 전통에서 비롯된 설위설경(設位設經;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앉은 굿을 위해 한지로 무구를 만드는 전통과 기술)과 일본의 전통 종교인 신토(神道)에서 사용되는 고헤이(御幣;흰 종이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접어 끼워서 장식한 나무 막대기)에서 비롯된 모티브에 근간을 둔다. 〈황홀망〉 연작은 형식상 두 가지 작품군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나쁜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굿당에 설치하는 문양 혹은 문자인 ‘진(陣)’ 혹은 ‘철망(Sacred Wire Mesh)’을 구성하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다.
반면 두 번째는 한국의 무속 신앙에서 망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넋전’이라는 무구에서 파생되어 보다 상징적이고 의인화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들어 작가는 〈황홀망〉 연작을 위한 방법론과 연구를 모국의 무속 전통을 넘어 슬라브족의 비치난키(wycinanki), 유대 전통 문서 장식인 케투바(ketubot), 미즈라(mizrah), 멕시코의 파펠 피카도(papel picado), 필리핀의 파발랏(pabalat), 중국의 전지(剪紙)공예, 일본의 키리가미(kirigami), 인도의 샨시(sanjhi)까지 확장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종이라는 재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황홀망〉 연작은 광범위한 인류문화사적 유사성을 다루며, 다양한 문화권에 따라 지역화된 영적 관습을 반문하고 초국적 맥락 내에서 재배치함으로써 상이한 전통을 포괄하고 기존의 개념에 도전한다.
지난해 치앙라이에서 열린 제3회 타일랜드 비엔날레 “열린 세상The Open World”에서 전시된 〈황홀망〉 근작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토착민족인 몽족의 샤머니즘에서 유래했다. 집집마다 갖춰진 몽족의 종이 제단에 기반한 〈에워싸인 집안 넋물길 – 황홀망恍惚網 #208〉(2023)은 한지와 화지를 사용한 여섯 점의 ‘황홀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다수의 몽족이 라오스를 떠나 태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디아스포라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대칭적 배열을 보이는 여섯 개의 복합적 문양은 작가가 비엔날레 사전 방문 당시 접했던 치앙라이 지역의 샤머니즘 혹은 애니미즘과 밀접하게 연관된 몽족의 영적 오브제들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이번 프리즈 뉴욕 현장에서 한지와 화지를 결합한 여덟 점의 개별 〈황홀망〉 작품을 선보이는데, 몽족의 문화에서 비롯된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이 최신작들은 섬세히 짜인 목재 구조물에 전시될 예정이다. 신성한 보존을 위한 제단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나무 구조물은 작품은 물론, 다양한 문화권의 종이 공예 전통을 소개하는 참고도서를 선보이는 거치대로 작동한다.
한편 양혜규는 2024년 6월 21일부터 일본 나오시마에서 개최되는 두 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먼저 싱가포르 미술관이 공동 주최하고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에서 열리는 베네세 수상자 전시가 있다. 양혜규를 비롯하여 팬데믹으로 수상전이 미뤄진 베네세 상(Benesse Prize) 역대 수상자인 판나판 요드마니(Pannaphan Yodmanee), 줄 마모드(Zul Mahmod), 아만다 헹(Amanda Heng) 등이 참가한다.
이와 동시에 오는 2027년까지로 예정되어 있는 장기 프로젝트로, 양혜규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이 함께 나오시마의 새로운 전시 공간인 마타베(Matabe)에서 “불의 고리(Ring of Fire)”를 선보인다.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것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의 접속 혹은 교신에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두 작가는 한 주택 공간에서 물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의 활발한 만남을 함께 탐구한다. “불의 고리”는 빛과 그림자, 움직임, 진동의 감각을 포괄한 환경을 구성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으로 구성된다.
2024년 9월 18일부터 아트 클럽 오브 시카고(Arts Club of Chicago)는 양혜규의 개인전 “평평한 작업 2004-2024(Flat Works 2004-2024)”을 개최한다. 제목이 시사하듯 이 전시는 〈황홀망〉 연작을 비롯해 지난 20여 년 간의 평면 작업군을 대거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전시에 맞추어 평면작업의 이해를 돕고 조각이나 설치작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하는 오리안나 카치오네의 심층적인 에세이와 다수 〈황홀망〉 작업이 수록된 도록도 출판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