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단색화’ 그룹의 선두주자이자 ‘울트라마린’의 작가로 불리는 김춘수(b. 1957)는 붓이 아닌 얇은 장갑을 끼고 손바닥과 손가락에 물감을 묻힌 채 캔버스에 ‘터치’하여 엷은 색을 쌓는 독특한 핑거 페인팅 작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90년대 초부터 약 30년간 ‘울트라마린’ 색의 푸른 회화 작업을 선보인 김춘수는 ‘파란색’을 그저 하나의 색이 아닌 그 안에 여러 자연의 빛을 머금은 깊고 푸른색이라는 점에 주목해왔다. 김춘수는 그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물감과 평면이 갖는 깊이감을 탐구하고 그 안으로 스스로 스며들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김춘수, 〈8012 CIRCLE 8012〉, 1980. ©김춘수
80년대 초, 김춘수 작가는 ‘사진작업’ 시리즈를 전개했다. 이때 그는 작가가 보는 시점이나 행적도 하나의 표현매체가 된다는 독립적인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카메라에 대상을 담았다. 그의 사진작업은 필름에 표현된 형상을 대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상(象)으로 표현되는 동안의 ‘시야’에 주목한다. 김춘수는 이를 통해 ‘신체화’의 개념을 확립하고, 나아가 ‘공간의 성질’과 ‘사물과의 관계’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김춘수, 〈8504 BROKEN WINDOW 10〉, 1985. ©김춘수
80년대 중반에는 ‘안과 밖의 중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한 〈창〉 시리즈를 선보였다. 〈창〉 시리즈는 종이와 면포 위에 창 혹은 창틀처럼 보이는 선을 긋고 화면을 아크릴 물감과 먹으로 지워가는 작업이다. 작가는 ‘창’을 마음(안)과 세계(밖)가 만나는 구조라 여기고, 그러한 실재와 보이는 세계의 구조적 차이를 ‘지워감의 방식’을 통해 양자의 구조적 상황을 하나로 통합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냈다.
김택상, 〈Breathing of mellow orange〉, 2009 ©가인화랑
1990년대 초부터 발표한 김춘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상한 혀〉 시리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회화로 풀어낸 작업이다. 〈수상한 혀〉 시리즈는 말이나 시각적 이미지가 무언가를 서술하는 데에 있어 의도와 목적의 개입으로 인해 오히려 현실과 본질에서 가장 멀어지게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김춘수는 이러한 서술의도 개입으로 생겨난 현실(본질)과의 거리를 없애기 위해 무의식적, 비의도적인 작가의 호흡을 반영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직접 손에 물감을 묻혀 화면 전면에 물감을 찍어 그려내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선들의 무수한 중첩과 지워짐의 반복과정에 형식의 변화와 리듬을 부여했다.
김춘수, 〈SWEET SLIPS 9932&9933〉, 1999. ©노화랑
이후 선보인 〈무제〉, 〈SWEET SLIPS〉, 그리고 〈희고 푸르게〉의 시리즈에 연속하여 ‘그리기’의 의미에 관한 질문과 해답을 찾기 위해, 작가는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을 통한 그리기에 몰두했다. 김춘수는 붓으로 그림을 그릴 때 늘 비슷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다가가고자 하는 회화의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느낀 것을 계기로, 종이나 두루마리 휴지에 물감을 묻혀서 캔버스 위에 찍어 바르거나 얇은 비닐장갑을 여러 겹 착용하여 붓 대신 손가락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실험했다.
이러한 신체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그리기는 정작 무언가를 그리지 않게 되었다. 신체와 물감을 일치시킴으로써 어떠한 형상이 주제가 아닌 물감 자체가 구체적인 실체로서 화면 위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김춘수, 〈울트라-마린 1901〉, 2019. ©신라갤러리
2002년부터 지금까지 선보이고 있는 그의 대표작 〈울트라-마린〉 시리즈는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울트라 마린’은 물감 색상 이름이면서 의미적으로는 바다를 뜻하는 ‘마린’과 초월을 뜻하는 ‘울트라’를 조합한 단어이기도 하다. 작가는 언뜻 푸른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색면회화의 표면 너머 물감의 깊은 층처럼 깊은 그림의 공간감 속으로 통과하여 ‘회화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였다.
김춘수는 언어의 다중적 의미가 가지는 재치와 사유적인 요소를 개념적으로 차용하고, 동시대 미술에 의문을 던지고, 회화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성에 대한 답을 얻고자 끊임없이 실험하고 노력해 오고 있다. 즉, 그는 신체의 반복이라는 행위를 통해 회화 자체의 본질에 근거한 사유적 실험을 지속해오며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은 침묵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는 언어의 한계 너머에도 그 무엇이 분명 존재하는 것을 믿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양상으로든지 표현해내려는 역설, 그에 대한 의지가 예술정신의 다른 이름일 게다.”
김춘수 작가 ©표갤러리
김춘수는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회화과 전공 석사 그리고 뉴욕대학교 미술전공으로 박사를 받았다. 1993년 제3회 토탈미술대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제23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되었고 2003년 스페인 알깔라대학교 초청연구원으로 있었다. 1996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조현화랑, 선갤러리, 갤러리 이배, Galerie Son(베를린), 더페이지갤러리, 서울대학교 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뮤지엄 산 등에서 단체전에 참가하였다. 그의 작품은 LA Artcore Center, 아트선재센터, 한솔문화재단, 토탈미술관, 성곡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스코센터, 대전시립미술관, 주독일 대한민국대사관 등에 소장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