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b. 1958)은 1990년대 초반부터 회화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미술사적 구조를 탐구해왔다.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에서의 정면으로서의 평면에 의문을 제기하며 회화에 대한 다층적인 탐구를 〈회화의 지층〉 연작으로 지난 30여 년간 풀어내 왔다.
그의 작품 세계를 일관하는 ‘회화의 지층’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에피스테메(L’épistémè)’라는 철학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미셸 푸코는 모든 담론은 그 배경이 되는 인식의 구조가 있고, 그것이 지층처럼 시대적인 구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그 체계를 ‘에피스테메(L’épistémè)’라 칭했다. 이인현은 측면을 강조한 일련의 회화들로 전통적인 회화의 정면성에 축적된 미술사적 역사를 드러내고, 회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 구조에 새로운 지층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인현은 회화의 화면을 캔버스의 정면만이 아닌 모서리를 넘어 옆, 위, 아래까지 확장한다. 작가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캔버스가 아닌 두께감이 있는 입체적인 캔버스를 택했다. 나아가 그리는 순간의 정면이 측면으로, 측면은 정면으로 전시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두 캔버스를 마주보게 붙여서 정면은 접합부로 숨어버리고 측면만이 제시되기도 하며, 캔버스 천을 완전히 펼쳐서 전개도와 같이 고정시켜 놓음으로써 정면과 측면이 모두 정면이 되는 회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인현의 회화에서는 결국 정면과 측면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이인현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캔버스에 물감을 스며들게 하는 기법이다. 그는 캔버스 위에 ‘대가의 한 획’을 긋는 대신 의도적으로 작가의 손길을 배제한다. 붓을 캔버스에 직접 대지 않고 물감이 떨어지도록 가만히 들어 묽은 유채 물감을 천에 내려 놓는 방식을 사용한다.
작품이 가진 물성을 강조하고 작가의 손길이 이끄는 완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하는 이 모든 작업은 시각적인 감상의 영역을 확장시켜 회화를 이해하는 인식의 구조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모든 작품은 하나하나의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그가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모든 행위, 그의 삶을 따라 흐르는 ‘회화의 지층’에 대한 연속적인 작업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이인현, 〈회화의 지층〉, 1996 ©아르코예술기록원
이처럼 기존의 정면 위주의 캔버스 틀과 작가의 손길이 강조되던 전통적인 회화를 전복시키는 그의 작업은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며 이인현만의 회화의 지층을 이루어 왔다.
위아래로 똑같이 스며 나온 물감의 흔적을 붙여 대칭형을 보여준다던지, 바다같이 넓고 푸른 색면 위에 연결된 다른 캔버스의 접합부분에 마치 아지랑이나 안개처럼 엷은 물감의 번짐을 배치한다던지, 얇게 썰어낸 치즈모양의 캔버스들 위에 서로 엇비슷하게 크고 작은 점(구멍)들을 찍거나 사라지게 한다던지,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진 주사위모양의 큐브형 캔버스에 몇 개의 점들을 짐짓 회화적인 배치로 찍는 등의 다양한 회화적 실험은 조형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측면도 함께 감상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이인현, 〈회화의 지층〉, 2006 ©노화랑
한편, 이인현 작가가 2006년에 선보인 〈회화의 지층〉은 기존의 제작방식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먼저 긴 나무막대에 캔버스 천을 감싸 짙은 푸른색 물감을 가득 머금게 한 다음, 이 막대를 붓 대신 사용하여 넓게 펼쳐 놓은 생 캔버스 위에서 물감이 번지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스쳐 지나가게 한다. 이때 나무막대는 캔버스에 밀착되지도, 완전히 떨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일정한 속도로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지나간다.
이러한 기법 또한 작가의 개입을 배제한 기존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캔버스와 긴 막대의 역할에 의존하는 작업이다. 마찰에 의해 만들어진 화면은 작가의 의도나 통제가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캔버스의 미묘한 요철이나 변수들이 손의 떨림과 함께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캔버스 화면은 각기 다른 사이즈의 캔버스 틀에 부분적으로 선택되어 작품이 되고, 그 캔버스들은 다시 조합되기도 한다.
이인현, 〈회화의 지층〉, 2006 ©노화랑
이인현은 〈회화의 지층〉 시리즈에 ‘재생’이라는 부제를 붙여 또 다른 회화의 매체적 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받침대로 쓰이거나 물감의 농도를 시험했던 천을 사용하거나 이전에 만들었던 작품을 새로운 작품으로 재구성하거나, 작업 테이블이나 붓, 커피잔이나 아이의 신발과 같은 ‘물건들’을 ‘작품’ 위에 덧붙임으로써 모든 작품이 다른 작품의, 모든 물건들이 다른 물건들의 새로운 역할로 ‘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를 그림의 액자처럼 사용하면서 프레임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상기시킨다거나, 제작년도가 10년 이상 차이 나는 작품들을 쌓아 올려 이미지의 문맥을 보여준다거나, ‘피처링(featuring)’의 개념을 도입해 정광호 작가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서로 중첩함으로써 매스가 결여된 조각과 두께를 가지는 회화의 물리적인 동거를 보여주는 등 다채로운 시도를 해왔다.
〈회화의 지층〉 시리즈의 최근작인 〈회화의 지층-라그랑주 포인트〉는 ‘프레임을 포함한 작품’들로 제작되어 작품의 내외부를 결정짓는 공간의 구획에 다채로운 변주를 가져온다. 작품의 영역에 들어간 프레임은 작품의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선을 모호하게 만든다. 벽에서 뻗어 나온 철선은 캔버스 너머의 벽을 작품 안으로 끌어온다.
부제인 ‘라그랑주 포인트’는 풀 수 없는 삼체문제의 특수해로, 두 개의 천체 사이에서 중력적 평형을 이루는 궤도상의 지점을 뜻한다.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명쾌하게 밝혀진 두 지점 사이의 중력 작용과 달리 공식이 성립할 수 없는 삼체문제에서 수학자 라그랑주가 중력이 0이 되는 예외를 밝혀낸 지점이 라그랑주 포인트로 명명된 것이다.
전통적인 회화들 사이에서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이인현의 회화는 ‘라그랑주 포인트’에 위치하며, 정면과 완결을 요구하는 회화의 틀에 대해 곁눈질해서 볼 것을, 회화를 구성해온 시간을 염두하고 작품을 볼 것을, 작품의 완결성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유한다. 이러한 이인현의 작업은 주된 것과 주변의 것, 미완성과 완성,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이라는 생각의 틀을 부순다.
“어떤 이미지를 임의로 제가 그려낸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물리적으로 그렇게 나올 수 밖에 없게끔 하는 제작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면에도 작품이 있으니까 돌아다니면서 볼 수 밖에 없죠. 작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감상한다기 보다는 작품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합니다.” (ABN, 이인현 인터뷰, 2024.04.04)
이인현 작가 ©문화경제
이인현은 서울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뒤 일본에서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성대학교 회화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그랑팔레 파리, 일본 세이부 미술관, 말레이시아 내셔널아트갤러리, LA 아트코어갤러리, 싱가포르 현대미술연구소 등 국내외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영국 대영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