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포스트 단색화가인 김택상(b. 1958)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 강원도 원주에서 자란 작가는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색채에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김택상은 자연의 색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물의 영롱함을 표현하기 위한 물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지금의 작업을 완성해왔다.


김택상, 〈무제〉, 2004 ©케이옥션

어느 날 우연히 다큐멘터리에서 본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분화구 물빛에 매료된 작가는 이를 화폭에 담아내려 하였으나, 그동안 그려왔던 방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오랜 시간동안 물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가는 물의 색, 물빛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고 나서 이전의 기법을 모두 버리고 물빛을 최대한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94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물’ 시리즈는 대부분 청색 위주의 회화였다. 이에 대해, 작가는 물은 파란색이라는 ‘개념’과 ‘언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물에 대한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작가는 물의 색이 성분과 환경에 따라 여러 색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구축하게 된다.


김택상, 〈시간의 정지〉, 2004 ©국립현대미술관

김택상의 ‘물 작업’은 작가의 붓질을 통해 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닌, 물이 그림을 그리도록 지휘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기울기가 있는 오목한 캔버스 틀을 제작하고 아크릴을 희석한 물을 부어 캔버스가 잠기도록 한다. 이후 물에 잠기는 표면의 면적과 침전되는 시간을 조절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건조시킨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층을 쌓으며 빛과 색을 화면에 담아낸다.

이 과정에는 작업실 안의 빛, 바람, 시간, 공기, 계절 등 여러 자연적인 요소들이 개입된다. 가령,색을 내리는 과정에서 ‘중력,’ 캔버스를 말리는 과정에서 ‘바람’과 ‘햇빛’이 필요하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의 개입을 통한 통제되지 않은 빛의 효과를 얻기 위해 작가 자신의 개입은 최소화한다. 그의 2004년작 〈시간의 정지〉 또한 캔버스 위에 수묵처럼 스며들고 번져 나간 물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이 화면 안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김택상, 〈Breathing of mellow orange〉, 2009 ©가인화랑

이와 같은 반복적인 작업 과정 속에서 얇은 레이어들이 겹겹이 쌓이게 되면서 완성된 화면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빛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김택상의 〈숨 쉬는 빛〉 시리즈는 제목처럼 실제로 살아 있는 빛과 색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움직임에서 들숨과 날숨처럼 생동하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그리고 작가는 생명의 공명이 빛깔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김택상의 작업은 생명이 없는 사물인 캔버스에 자연의 생명체가 가진 색과 같이 실제로 ‘살아 있는’ 것과 같은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김택상, 〈Breathing light- In between light purple〉, 2013 ©가인화랑

작가는 이렇게 색채와 빛의 근본적 원리와 특성에 대한 심층적 사유와 함께 색상 선택이나 물감 재료 자체의 물리적 성격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색상 선택에 있어서 작가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 반응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작가는 보라색을 사용할 때, 가장 마음의 안정감과 평온한 상태가 된다고 했다.

사실 김택상의 회화는 단색화로 불리지만 온전히 한 가지 색으로만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가지 색을 침전시키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최종적으로 하나의 단색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색상의 물감이 서로 섞이지 못하게 되어 단색의 화면이 아닌 다른 색의 층이 형성된 화면이 우연히 만들어지기도 한다. 즉, 작가의 완벽한 통제에 의해 구현된 회화가 아닌 자연의 작용 과정이 이끄는 여러 가능성 또한 열어 두며 이와 함께 공명하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택상, 〈Breathing light- In between light purple〉, 2013 ©가인화랑

2023년 리만머핀 서울에서 개최된 미국 작가 헬렌 파시지안과의 2인전 “반사와 굴절(Reflections and Refractions)”에서 작가는 신작 〈공명〉을 선보였다. 〈공명〉 시리즈는 이전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이 충만한 빛을 자연적 요소들의 참여로 담아내는 작업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전보다 좀 더 자유로운 색채의 결이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작가는 〈공명〉에 대해 진동이 다른 두 소리가 서로 간섭해 강약을 반복하며 소리를 더 멀리 퍼뜨리는 ‘맥놀이 현상’에 착안하여, 본인 그림도 시간 차에 따른 ‘사이 공간’을 두고 겹겹이 색을 더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김택상의 회화는 작가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작가와 물, 중력, 바람 등 자연적 요소들이 캔버스 틀 안에서 만나 유기적인 협업을 이루고 공명하며 시간의 역사로서의 결과물로 완성된다.

“물이 스스로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라 나는 지휘자에 불과하다. 물이나 시간, 중력, 바람 등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보살피는 농부의 역할과도 닮았다.”


김택상 작가 ©리만머핀

김택상은 중앙대학교 회화과에서 학사를,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리안갤러리 서울과 대구, 도쿄 다구치 파인 아트, 리만머핀 팜비치를 포함한 다양한 기관에서 여러 개인전을 열었고, 리만머핀 서울, 대구시립미술관, 에스더 쉬퍼 베를린과 서울 등을 포함한 세계적인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다수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020년 청주대학교 교수직을 은퇴하고 현재 작가로서 작업에 더욱 깊이 몰두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