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영(b. 1979)은
철저한 리서치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 지정학, 이송, 초국적 이동 등 역사적 사실과 동시대적 이슈를 다층적인 내러티브로 재구성한 작업들을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의 형태로 선보여왔다.
특히 그는 그러한 역사와 현실의 문제로부터 빗나가고 이탈하는 존재와
사건들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한 존재들의 모호하고 중간적인 상태에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사실’이라 믿는
것 이면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비선형적이고 유동적인
사변적 서사로써 풀어나간다.
김아영의 초기작 〈이페메랄
이페메라〉(2007-2009) 시리즈는 신문에 보도된 비극적인 사건들을 포토 콜라주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작가의 미디어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된다. 뉴스는 다양한 인간의 유한한 삶을 그 내용이 아무리 잔혹하고 무거울지라도 납작한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소비 가능한
기호로 변모시킨다.
인간의 삶은 신문지상에서
결국 소비적인 기사거리에 불과할 뿐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로 이송되고 곧 잊혀진다. 김아영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혹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실재와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재현하기
위해 현실에 존재하는 형상을 모았다.
작가는 미디어상에서 주어진
정보를 통해 사건의 장면을 상상한 후, 작가가 접한 현실에서 구체적 형태와 표면을 사진 찍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문맥에 맞게 수정한 다음 오려 세워 각각의 장면을 구성했다.
빈약한 종이 무대장치와 그것을 찍어 낸 2차원상의 사진은 이페메라(덧 없는 유한한 삶)의 이페메라(쓰임이
다한 후 수집품이 되는 아이템)이자, 현실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퍼즐이 된다.
한편 〈PH 익스프레스〉(2011-2012)는 19세기 말 영국군의 거문도(포트 해밀튼) 점령사건을 모티프로 한 프로젝트로, 자료 조사를 통해 작성한 극본을
바탕으로 한 영상과 신문의 형태로 재물질화한 텍스트로 구성된다.
〈PH 익스프레스〉는 기록되었으나 회자되지 않은 텍스트를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김아영은 기밀 외교문서, 유력일간지, 타블로이드, 삽화
등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각종 사료들을 통해 당시 유럽 및 아시아의 지정학과 외교 및 계급 시스템이 어떻게 현재와 공명하는지 되짚었다.
작가는 방대한 양의 리서치를 통해 대중언론과 외교문서의 간극이 존재하며, 이
간극은 또한 한국에서 연구된 대부분의 자료들과 영국에서 발간된 자료들이 갖는 간극과 묘한 이항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료들은 거문도 점령이라는 국지적 사건이 실은 당시 유럽 열강의 역학관계 안에서 벌어진 국제 이슈였으며, 어떻게 해밀튼항이 쇄국과 내분으로 무력해진 자국을 배제한 채 뜨거운 감자로 작용하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영상 작업 〈PH 익스프레스: 2채널
비디오〉의 대사와 나레이션의 대부분은 이러한 사료들로부터 추출, 인용되고 재배열된 텍스트 꼴라주로 이루어진다. 영상은 영국의 외교관, 귀족들, 함장, 선원의 거문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태도를 블랙코미디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이처럼 현실의 사건을 바탕으로 내러티브를 재구축하는 그의 작업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2015)에서
내러티브 사운드/음악극의 형식으로 실험된다. 세 개의 버전으로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근대에 이르러 에너지원으로 재조명된 역청-석유자원과 둘러싼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 시리즈는 역청의 역사, 석유자본의 기원, 1970-80년대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 이를 매개했던 석유파동이라는
전지구적 에너지 위기, 그리고 건설회사 직원이었던 작가의 아버지가 머물렀던 산유국 쿠웨이트의 근대화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교차하며 근대의 발명품으로서 석유가 영향 미쳐 온 다양한 시공간들에 주목한다.
김아영은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이 이야기를 알고리즘 기술로 변형시켜 또 다른 이야기를 추가로 생성했다. 그리고
작가가 쓴 이야기에 작곡 알고리즘을 통해 곡을 붙였고, 알고리즘으로 만든 이야기에는 작곡가가 만든 곡을
붙였다.
이러한 서사를 이끄는 성우와 배우들의 목소리에 음악적 구성을 담당하는 보이스 퍼포머들의 코러스를 더해 목소리들의
다성적이고 혼성적인 직조가 이루어졌다. 근대의 발명품 석유자원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그의 작업에서 다양한
시공간 속 인물들의 형체 없는 목소리를 통해 소환된다.
프로젝트의 3번째 버전인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3〉(2015)은 6채널 사운드 설치, 벽
다이어그램, 20분 분량의 7인의 보이스 퍼포먼스로 이루어졌다. 알고리즘 장치로 생성된 서사는 임의의 규칙으로 도출되어 의미와 맥락이 소실되어 있다.
본 프로젝트에서 알고리즘 장치의 개입은 종종 일관적 내러티브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그럼으로써 전체 구조에 균열을 가하며 그 벌어진 틈새로 이야기의 무수한 확장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그의 사변적 픽션(SF: Speculative Fiction) 작업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은 지하 지질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물리적 이주와 데이터 이주의 개념을 병렬하거나 호환한다. 작가는 지상에서의 물리적 이주뿐 아니라 지층에 매립된 광섬유 케이블을 통한 데이터와 정보의 이주를
매개하는 ‘땅’이 가진 다공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다공성’이라는 개념을
내러티브적 장치로 가져온 이 작업에는 세 가지의 다공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첫 번째는 광물자원 추출로
인해 지표면 아래가 점진적으로 듬성듬성해지는 지질학적 다공성, 두 번째는 데이터의 손실과 관련된 데이터의
다공성, 마지막으로 내러티브 구조에서의 다공성이라 볼 수 있는 플롯 구멍이 있다.
영상은 가상의 공간 ‘다공성 계곡’에
거주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라는 광물 덩어리가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또 다른 암석 플랫폼으로 이주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는 이주 데이터 센터에서 마련해준 복제된 다공성 계곡으로 보내지며, 그곳에서
갑자기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나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둘이 결합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이야기는 지하 지질 구조 내의 다공성 공간을 관통하고 밀고 당기며 나아간다.
지질의 영역을 존재의 물리적 이주 및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양방을 위한 터전으로 간주하면서, 작업은
다양한 시공간의 지층을 오가는 변이를 제안한다. CGs, 3D 영상 및 크로마키 합성 영상 등의 다양한
시각 요소는 서로 충돌하고 관통하며 다층의 합성 사운드 및 음성과 함께 공존한다.
작가가 본 프로젝트에서 처음 시도한 사변적 픽션과 사변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은 실현 불가능한 현실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불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현실과 연계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일시적 이탈을 가능케 함으로써 인식된 현실 너머의 상상 가능한 영역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김아영은 2019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 참여하며 본 프로젝트의 두
번째 사변적 픽션 시리즈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을 발표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21세기의 이주의 양상인 난민의 이주와 데이터 이주 양쪽을 중첩시키며 다시금 마이그레이션의 의미에 대해 파고든다.
영상은 가상의 시공간에서
주인공 페트라가 난민으로서 ‘존재하는 방식’과 그가 겪는
생명정치적 통제를 보여주며 이주민, 난민, 강물, 데이터 등이 넘나드는 이 견고한 땅과 국경이라는 개념에 대해 성찰한다.
김아영은 이와 같은 프로젝트들에서
사변서사를 새롭게 직조하며 동시대의 난민 이슈를 비롯해 국경을 넘어 발생하는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 관점의 비자발적 이주에 집중했다면,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에서는 배달 라이더로 상징되는 디지털 풋 프린트를 수집 당하며 앱 알고리듬에 지배당하는 동시대의 주체들의
반강제적 이동과 앱과 연동된 신체 감각을 탐구한다.
영상 작업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 퓨처리즘 사이에 놓인 가상의 도시 서울에 살며 끊임없이 갱신되는 배달 앱의 네비게이션 미로에 갇힌 채 질주하는
여성 배달 라이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배달 플랫폼인 딜리버리 댄서사의
마스터 알고리듬인 댄스 마스터는 앱을 통해 소속 댄서(배달 라이더)들을
촘촘히 관리하며 무한한 배달을 송신한다. 송신 과정에서 발생한 위상학적 뒤틀림과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주인공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마주하게 된다.
본 프로젝트는 긱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뿐 아니라 현실 위에 모바일 스크린의 형태로 포개어진 위상학적 미로-앱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와 현실 양쪽 동시에 거주하는 존재의 양태, 가능세계
이론, 배달 라이더들의 극단적 각성상태, 신체와 시간에 대한
끊임없는 최적화를 요구하는 가속주의적 촉구 등을 담고 있다.
올해 ACC 미래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김아영은 현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진행중인 개인전에서 〈딜리버리 댄서의
구〉의 후속작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2024)를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서구 근대화 이후 사라져가는 비서구 문화권의 전통적 우주론과
시간 체계를 탐구하고 인공지능과 협력해 가상세계가 상향된 미래의 모습을 그린다.
전편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이번 작품에서 먼 미래의 고립된 가상 도시의 주민으로 등장하며 우연히 소멸된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을 배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시간관과 가능세계 사이의 충돌을 일으킨다.
이러한 서사와 함께 영상은 소멸된 우주론과 또 다른 시간 체계가 병존하는 가능세계, 그리고 시공간을 흔드는 연출 방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며 전통과 현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왔던 모든 사실이 흔들리며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전지구적 위기의 상황에서, 김아영의 작업은 우리의 사변적 상상을 자극하여 누락되고 잊힌 이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야기’라는 것은 발화를 통해 늘 변화하고 변형되는
성질을 지녔고 따라서 모든 종류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합성적 성격을 띤다.” (김아영, 작가 노트)
김아영은 2024년 MoMA 뉴욕현대미술관,
홍콩 M+, 2023년에는 오스트리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페스티벌, 바젤 HEK(House of Electronic Arts), IFFR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 CPH:DOX 코펜하겐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2년
타이페이 관두비엔날레, 2021년 타이충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
2020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부산비엔날레, 2018년
광주비엔날레, 일민미술관, 2016년 파리 팔레드 도쿄,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 작품으로 2023년 오스트리아의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뉴 애니메이션 아트 부문 골든 니카상, 일본의 제37회 ‘이미지
포럼 페스티벌’ 테라야마 슈지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국 테이트
모던, 메츠 Frac 로렌느 프랑스 지역현대미술콜렉션,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 샌프란시스코 카디스트 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리우데자네이루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
- 김아영, Ayoung Kim (Artist Website)
- 갤러리현대, 김아영 (Gallery Hyundai, Ayoung Kim)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Asian Culture Center, ACC Future Prize 2024: Ayoung Kim)
- 국립현대미술관, 김아영 b |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3 | 2015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Ayoung Kim b | Zepheth, Whale Oil from the Hanging Gardens to You, Shell 3 | 2015)
- 국립현대미술관, 김아영 b |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 2017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Ayoung Kim b | Porosity Valley, Portable Holes | 2017)
- 갤러리현대, 김아영 : 문법과 마법 (Gallery Hyundai, Ayoung Kim: Syntax and Sorc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