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근(b. 1978)은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시대적 부산물과 광경을 입체적으로 재조명한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의 이면에 직접 접촉하며 관계를
맺고, 이를 영상, 사진,
설치를 통한 매체적 실험으로써 풀어나간다.
박경근, 〈청계천 메들리〉, 2010 ©서울독립영화제
2010년 발표한 〈청계천 메들리〉는 재개발 현장이 된 청계천과 그곳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감각한 풍경을 영상이라는 매체로써 담아낸 작품이다. 당시 작가는 청계천
공구거리에 공간을 임대하여 그 지역과 사람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영상으로 기록했다.
영상은 작가의 할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의 형태로 전개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고철 공장을 운영하다 해방 후
청계천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의 기억으로 작가의 꿈에는 종종 쇠를 깎고 다듬는 장면과 날카로운 쇳소리가
등장하곤 했다.
작가는 이 현장에서 작업하고
생활하며 다시금 마주한 자신의 무의식,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를 거쳐 형성된 집단적 무의식을 영상과 사운드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박경근, 〈청계천 메들리〉, 2010 ©한국영상자료원
박경근은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공간인 청계천에 대한 어떠한 메시지나 의미를 담기보다 그가 직접 보고 들은 현장의 감각적 풍경으로써 세대를 통해 내려온 무의식을 의식적인
예술로 풀어나간다. 작가의 사적인 흐름으로 전개되는 〈청계천 메들리〉는 청계천의 소멸을 사적 기억과
공적 기억이 뒤얽히는 ‘주관적 다큐멘터리’로써 기록하고 있다.
박경근, 〈철의 꿈〉, 2013 ©CICA
이후 박경근은 영상 작업 〈철의
꿈〉(2013)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를 통해 한국 산업화의 상징인 선박을 새롭게 바라보았다. 작가는 거대한 크기의 곡선 외형을 가진 고래의 이미지로부터 선박의 이미지를 겹쳐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가는 작업을 진행하며 고래와
배 모두 각각 선사시대와 한국 근현대의 문명을 발전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는
과거와 현재의 한국을 “먹여 살린” 존재로서 고래와 현대중공업의
배, 그리고 포항제철소의 쇠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끌었다.
박경근, 〈철의 꿈〉, 2013 ©CICA
영상은 신을 찾기 위해 비구니가
된 전 여자친구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을 찾아보겠다며 울산으로 떠난 화자의 음성 편지로 시작된다. 이후
영상은 불교 의례 장면을 매개로, 고래를 새긴 암각화에 제의를 지내던 ‘과거’와 거대한 선박을 축조해 내는 ‘현재’를 오간다.
작가는 이러한 산업 현장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광경을 매우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장엄하게 담아내며, 오늘날 인류에게
새로운 ‘신’이 된 철에 숭고미를 부여한다. 이와 더불어 영상에 삽입된 말러 교향곡과 한 번에 두 가지의 소리를 내는 발성법인 티베트 찬트(chant)의 사운드는 철의 신격화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박경근, 〈철의 꿈〉, 2013 ©CICA
또한 영상에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농성 장면과 같은 푸티지가 교차되며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철의 꿈〉에 대해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 매체로 그리는 산업시대에 대한 반구대 암각화”로서의 작업이라 설명한다.
박경근, 〈1.6초〉, 2016 ©대전시립미술관
2016년 현대자동차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1.6초〉는 오늘날 자동화, 기계화된 환경 안에서의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작가는 당시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에 발생한 노사분규가 로봇의 생산시간을 1.6초로 단축하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목격한 공장의 구조는
인간의 신체적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닌 로봇의 기계 박자에 의해 인간이 적응하며 그에 맞는 기계화된 움직임으로써 굴러갔다. 그 안에서 작가가 또한 목격한 것은 로봇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과 그에 비해 단순한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는, 생기 없는 회색 빛 얼굴의 인간이 이루는 아이러니한 풍경이었다.
박경근, 〈1.6초〉, 2016 ©대전시립미술관
대량생산 공장 안에서 기계는 마치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한편 생명을 가진 인간은 기계화되어 있었다. 작가는 이를 보며 “로봇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면 어떨까?” 또는 “로봇의 시선으로 공장을 바라보면 어떤 이미지들이 나올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영상은 내러티브나 서사의 구조 없이 단지 ‘움직임’ 자체에 초점을 맞춘 이미지들로만 구성된다. 영상 속 역동적인 이미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과연 인간이 로봇보다 더 많이 느끼고 창조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그저 조직과 사회에 속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에 불과한지에 대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박경근, 〈군대: 60만의 초상〉, 2016 ©박경근
한편 〈군대: 60만의 초상〉(2016)은 군복무 중인 젊은 군인들의 초상을 영상으로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도
작가는 스토리보다 병사들의 표정과 움직임 자체에 주목했다. 영상은 정해진 규율에 맞춰 하나의 군집을
이루는 모습과 병사 개인의 표정이나 신체 부분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는 장면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작가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군대의 모습은 개인과 집단의 모순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같은 옷을 입고정해진 틀에 맞춰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입술을 씰룩거리고 곁눈질을 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개인성이 더 드러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박경근, 〈군대: 60만의 초상〉, 2016 ©박경근
이 작업은 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다 입대를 위해 귀국한 작가의 군대 경험에서 출발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 환경에서 생활하다 집단의 규율이 개인보다 중요한 군대라는 장소에 들어오며 어쩔 수
없이 집단에 들어가 ‘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을 마주했다고
말한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아주 괴로우면서도 강렬한 경험이었다. 제대한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작가는 이러한 경험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거리를 두고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영상에 담긴 군대의 모습은 단지 보이는 그대로를 기록한 것이 아닌, 박경근이라는
개인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본 군대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 어린 병사들 개개인에 대한 초상이다.
이듬해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선보인 〈거울 내장: 환유쇼〉(2017) 또한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다.
작품은 14m 높이의 수직적인 공간에서 K2 소총을
들고 일률적인 제식 동작을 반복하는 로봇 군상과 로봇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조명으로 구성된다.
총을 든 로봇 군상들 사이에 들어온 관객은 거대한 수직적인 벽면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총구를 들고 있던 로봇들은 어느 순간 큰 소리를 내며 관객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제식 동작을 하듯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총마다 돌아가는 각도가 상이하다.
청각과 시각을 압도하는 이 설치 퍼포먼스는 순간적인 공포심을 유발한다. 작가는
직접 군대에서 경험했던 개인을 집단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인 공포심을 예술의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집단 가운데 개별성을 띄고 있는 로봇들, 로봇 군상 너머 거대한 그림자로
비춰지는 관객의 모습, 그리고 핏줄 같은 케이블 선을 다 드러내고 있는 컨트롤 박스가 이루는 감각적인
장면은 집단화된 시스템 속 개인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이처럼 박경근의 작업들은 집단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동아시아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감각과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그의 감각으로 새롭게 풀어낸 세계는 작가의 내면에서 출발하지만 그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과도 공명한다.
“좋은 작품은 일차적으로 눈으로 보지만 결국은 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반응하게 하기 위해 육체적인 경험을 이끌어 내고 몸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배경지식 없이 작품의 이미지, 동작, 색이나 질감, 리듬으로서의 경험이 텍스트와 다른 즉각적인 체험이
현대미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박경근, 더 스트림 인터뷰, 2015.10.06)
박경근은 캘리포니아주립대 디자인 미디어 아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필름&비디오과를
졸업했다. 그의 작품들은 201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HotDocs, 뉴욕현대미술관 (MoMA), 타이페이 비엔날레, 샤르자 비엔날레 등에서 다수 전시, 상영되었다. 그의 최근 개인전으로는 “이중거울(Double Mirror)”(상하이 유리미술관, 2020)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상하이 OCAT 미술관, 2022)이
있다.
작가는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2015), 리움 삼성미술관 아트스펙트럼상(2016), 부산국제영화제 최우수다큐멘터리상(2018)을 수상하였으며,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 아트바젤 BMW Art Journey(2021) 선정, Chanel x Frieze,
Now & Next(2022)에 선정되는 등 국내외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인정받고 있다.
References
- 박경근, Kelvin Kyungkun Park (Artist Website)
- 올해의 작가상 2017, 박경근 (Korea Artist Prize 2017, Kelvin Kyungkun Park)
- 서울독립영화제, 박경근 – 청계천 메들리 (2010) (Seoul Independent Film Festival, Kelvin Kyungkun Park - Cheonggyecheon Medley (2010))
- 아트인컬처, 탁영준 - 박경근 〈철의 꿈〉,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선봉장, ‘철’의 영상 미학, 2014.11.07
- 대전일보, "다양한 각도로 미술의 재미 찾길", 2020.11.02
- BAZAAR, 박경근과 이유성이 말하는 예술가의 삶, 2022.09.28
- 더 스트림, 철에 대한 개인적인 그리고 압축된 시공간의 꿈: 박경근 _Interview, 2015.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