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구(b. 1969)는 지난 20여 년간 ‘몸’을 주제로 다채로운 작업을 선보여 왔다. 작가는 해부학과 같은 과학의 영역을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과 함께 동원하여 신체의 변형과 왜곡, 확장을 실험해 왔다. 작가의 작업은 과학자의 실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동원되는 예술적 실험이므로, 작가는 자기 스스로를 ‘사이비 과학자’라고 소개하곤 한다.
이형구의 몸에 대한 주제 의식은 그의 초기작 〈The Objectuals〉 시리즈에서부터 출발한다. 미국 유학 시절, 작가는 서양인과 동양인인 자신의 신체의 차이를 경험하게 된 것을 계기로 머리나 손, 신체 각 부위에 착용하여 원하는 크기나 형태로 인체를 변형할 수 있는 장치를 제작했다.
그 중, 〈Altering Facial Features with H-WR〉(2007)은 광학필름과 렌즈 등을 부착한 헬멧을 착용해 눈과 입 등 얼굴의 특정 부위를 비정상적으로 확대시키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변형은 서구화된 미의 기준과 관상학적으로 좋은 얼굴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결과물은 도리어 기괴함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자연스럽다. 작가는 여기에 까맣게 색칠한 듯한 헤어라인과 알루미늄 호일을 이에 끼워 인공적인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어느 날 작가는 〈The Objectuals〉 시리즈를 통해 만들어진 눈이 비정상적으로 큰 얼굴 이미지로부터 만화 캐릭터를 연상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긴 생명체가 있다면 어떠한 골격 구조를 가질지에 대해 상상해오며 〈ANIMATUS〉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다.
이전 작업은 신체를 변형하는 실험이었다면, 〈ANIMATUS〉 시리즈는 해부학적 연구를 통해 만화 속 가상
캐릭터의 골격의 형태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역동적이고 익살스러운 제스처를 표현하는 작업이다. 만화 캐릭터는
실제 동물이 아닌 가상의 생명체이기에 그들의 뼈대를 구현함에 있어서 작가의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개입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동물에게는 없는 표정근 대신 뼈 자체를 이용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톰(Tom), 벅스 버니(Bugs Bunny), 도날드 덕(Donald Duck), 로드러너(Road Runner), 코요테(Coyote)에 해부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육체를 입힘으로써 만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캐릭터가 마치 독자적인 생명체로 실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형구, 〈Fish Eye Gear〉, 2010 ©두산아트센터
이형구는 동물의 신체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오며, 지구의 수많은
생명체들은 과연 세상을 어떠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Eye Trace〉
시리즈를 제작했다. 작가는 그러한 호기심에 대한 해답으로, 〈Eye Trace〉 시리즈를 통해 작가가 직접 동물이 되어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다.
물고기의 시각을 경험해보고자 제작된 〈Fish Eye Gear〉(2010)의 경우에는, 측면에 달린 물고기의 눈 구조와 같이 정면은 막혀 있고 측면에 어안 구조로 된 렌즈를 장착한 수트를 만들어
이를 입고 공간을 걸어 다니는 작업이었다. 물고기의 시야에 맞춰 움직이던 작가는 이내 자신이 물고기와
같이 지그재그로 걷고 있음을 발견했다. 즉, 시선은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고 그에 따른 특유의 동작이 나오는 것이었다.
〈Eye Trace〉 시리즈에 이어, 이형구는 말의 시각에 따른 움직임을 연구하는 작업 〈MEASURE〉(2014) 시리즈를 선보였다. 시리즈 초반에는 〈Eye Trace〉 시리즈처럼 정면을 보지 못하는 말의 시각구조를 각도가 넓은 뷰파인더를 이용해 구현하는 작업을 했으나, 이후 영상작업에서는 말의 시각보다 움직임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M 02, 2014, Pencil, Water color pencil on paper, Framed, 220 × 150㎝
작가는 마장마술 경기에서의 우아한 말의 움직임에 영감을 받아 말의 후면 신체구조를 연구하여 작가 몸에 그와 유사한 구조의 장치를 장착한 다음 말의 움직임을 재현했다. 작가는 장치에 말 꼬리를 달아 마치 진짜 말이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였으며, 무작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실제 마장마술에서의 말의 동작을 그대로 학습해 재현했다. 나아가 작가는 비디오 작업 속 녹음된 말발굽 소리의 운율을 악보로 채보하는 작업으로 발전시켰다.
신체의 외부 기관을 탐구하고 재해석해오던 작가는
〈X〉 시리즈에서 신체 내부의 더욱 미시적인 영역으로 그 시선을 돌린다. 〈X
variation〉(2021)에서 표현된 신체 내부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치 소우주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현대인의 인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작가의 고민에서 출발했다. 이에, 작가는 뼈에 철심을 박거나 인공 이빨인 임플란트를 잇몸에
삽입하는 등 이물질과 섞여 살아가는 현대인의 ‘순수하지 않은 인체’를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구현하기로 한다.
이로써 완성된 〈X variation〉은 살점을 연상시키는 폴리우레탄 폼, 뼈의 질감을 드러내는
페이퍼 마쉐,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 재료, 공간을 떠다니는
원형 재료들의 조화로운 충돌로 독특한 인체 풍경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작가의 몸에 대한 실험들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고 이해해보고자 하는 작가의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신체에서 출발하여 지구 내
다른 이종 생명체와 허구의 생명체의 신체에 이르는 그의 관심은 나와 타자, 나아가 세상을 더 이해하고
알고 싶은 작가의 바람에서 오는 것이다.
“기어가는 곤충들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날아다니는 잠자리의
겹눈으로 세상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내가 보는 이것이 맞는 형태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내 눈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의심하고 반성해야겠죠.
시선이 문제가 된다면 타인의 시선으로 한번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시점이 달라서 싸우는 것 아닌가요? 상대방의 시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톱클래스, 이형구 인터뷰)
이형구는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조소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그는 부산시립미술관(2022, 부산), P21(2019,
서울), 페리지갤러리(2015, 서울), 폴리테크닉 박물관(2015, 모스크바), 두산갤러리(2010, 서울), 바젤
자연사박물관(2008, 바젤), 아라리오 갤러리(2008,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제52회 베니스비엔날레(2007)에서
한국관 최초로 단독 전시를 가졌다.
또한 작가는 전북도립미술관(2020, 완주), 고양아람누리미술관(2019, 고양), 홀든갤러리(2018, 맨체스터),
돈의문박물관마을(2018, 서울),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2018, 서울), 대전시립미술관(2018,
대전), 국립현대미술관(2017, 서울), 베스트포센 쿤스트라보라토리움(2016, 베스트포센), 대구미술관(2015, 대구), 초이앤라거
갤러리(2015, 쾰른), 플라토 삼성미술관(2014, 서울)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