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진조각’으로
이름을 알린 권오상(b. 1974)은 조각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새로운 조형 구조를 탐구해
왔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통적인 조각의 존재 방식으로부터 반하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조형적
시도들을 수행해 오고 있다.
권오상은 대리석과 같은 무거운
재료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조각이 아닌 종이에 인화된 2차원의 사진 이미지들을 이용해 가벼운 조각을 구상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한 권오상의 조형적 탐구는 1998년도
초부터 시작된 〈데오드란트 타입〉 시리즈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데오드란트 타입(Deodorant
type)’이라는 제목은 권오상이 직접 만든 합성어로, 본래 가지고 있던 냄새를 간편하게
다른 냄새로 바꿔주는 탈취제 ‘데오드란트’와 암브로타입(ambrotype),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등과
같은 사진기술의 용어적 표현에 쓰이는 ‘타입’을 합친 단어다.
작가는 마치 사진기술사에
이미 존재하는 기법인 것처럼 ‘타입’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그간 탐구해온 조각의 존재론을 사진이라는 매체와의 융합을 통해 제시했다. 극동 아시안에게 거의 쓸모없는
용품인 데오드란트가 대대적으로 광고되는, 어딘가 어긋나고 핀트가 나간 현상으로부터 착안하여 시작된 이
작업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입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고 엇갈리는 현상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를 위해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수백 장의 사진 이미지를 오려 붙이는 방식으로 3차원의 사진조각을 제작했다. 더불어 확대, 축소, 복사 등 사진 매체의 특성을 활용하기도 하였는데, 가령 〈쌍둥이에 관한 540의 진술서〉(1999)는 하나의 소스로 만들어진 두명의 인물
조각으로 실재와 가상이 혼재된 모호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권오상, 〈Hockney〉, 2013 ©권오상
그의 초기 작업들은 주로 작가가 직접 대상을 촬영한 사진 이미지로 만들어졌다면, 이후에는
잡지 지면, 광고 이미지, 인터넷에서 내려 받은 이미지 등을
통해 제작되었다. 또한 초반의 〈데오드란트 타입〉은 내부가 비어 있는 형식이었으나 이후에는 아이소핑크(강화 스티로폼)로 형태를 만들고 그 외면에 사진을 뒤덮는 방식으로 변주되었다.
권오상, 〈Westwood〉, 2015 ©권오상
〈데오드란트 타입〉 시리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조형 탐구는 이 시대의 이미지를 통한 현대적 의미의 조각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시리즈의 후반 작업인 〈Westwood〉(2015)의
경우, 전통 조각의 특징인 좌대를 등장시키는 동시에 작가가 해석한 동시대 조각의 어법이 적용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사진조각은 사진
매체의 매커니즘적인 부분들이 중요한 요소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통 조각의 방법론과 존재론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하는 ‘조각’ 자체에 대한 작업이다.
권오상, 〈더 플랫 2〉, 2004 ©권오상
이어, 2003년에 발표한 〈더 플랫〉 시리즈는 일상 속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잡지라는 매체 안에
등장하는 동시대의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평평한 조각으로 제시한 작업이다. 이 시리즈는 1999년부터 작가가 집요하게 채집한 잡지 이미지들로 구성되는데, 주로
시계나 보석 등 사치스러운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우선 평면의 잡지 이미지를 그 모양에
따라 오린 다음, 사진 뒤에 철사를 붙여 바닥에 세웠다. 이처럼
평면을 입체로 구축하고 난 뒤, 다시 최종적으로는 사진 작업이라는 평면으로 귀결시킨다.
권오상, 〈더 플랫 15〉, 2005 ©권오상
권오상은 이러한 반전의 과정을 거듭한 〈더 플랫〉을
통해 조각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인 평면과 입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입체와 평면이 교묘하게
뒤얽혀 나타나는 〈더 플랫〉은 이전 시리즈인 〈데오드란트 타입〉과 뚜렷한 연관성을 가진다.
한편 2005년 발표한 〈더 스컬프처〉 시리즈는 사진을 조각의 재료로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대상을 실물로 보지 않은 상태로 인터넷, 서적, 잡지, 미니카 등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람보르기니와 같은 슈퍼카 조각을
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작가는 청동을 이용해 형체를 만든
다음 그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여 마치 플라스틱 소재의 가벼운 조각으로 보이게끔 했다.
권오상, 〈더 스컬프처 2 - Car〉(세부 이미지), 2005 ©권오상
〈더 스컬프처〉 시리즈는
기존의 사진조각 시리즈들과 물리적 특성을 달리 하지만, 전통 조각의 현대적 변용과 재해석이라는
지점에서 연관성을 가진다. 이 시리즈는 당대의 이상향을 실재에 가깝게 구현하고자 했던 전통 조각의 의미를
동시대적 감각으로 풀어낸다.
권오상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의 이상향으로서 값 비싼 슈퍼카를 대상으로 삼아 전통적 재료인 청동을
이용해 실제 형상에 근접하게 만들되, 주황색 아크릴 물감을 도포하는 등의 변주를 두며 전통 조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그리고 2016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권오상: New Structure
and Relief”에서 새로이 선보인〈뉴 스트럭쳐〉와 〈릴리프〉 시리즈 또한 이전 작업들과 이어져 있다.〈뉴 스트럭쳐〉의 경우, 〈더 플랫〉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었던 평평한
조각의 형태를 더욱 견고하고 큰 규모의 설치물로 변형함으로써 조각에 대한 논의를 공간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권오상은 채집한 사물의 이미지들을
크게 확대한 후 평평하게 제작하고 서 있는 구조물로 구조화했다. 이때 작가는 내러티브나 목적을 갖고
제작하기 보다는 자율적이며 무의식적으로, 특히 심미적인 판단으로 형태를 다듬었다. 이러한 〈뉴 스트럭쳐〉가 빚어내는 공간은 특정 내러티브가 없어도 조각 특유의 공간성과 연극성을 통해 사건을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힘을 가진다.
〈뉴 스트럭쳐〉에서 조각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탐구를 엿볼 수 있었다면, 〈릴리프〉 시리즈에서는 소조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동시대성을 담지한 이미지들을 조각적으로 배치한 작가의 시도가 드러난다.
〈릴리프〉는 동시대 글로벌
문화 트랜드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디자인 잡지 ‘월페이퍼(Wall Paper)’에서 채집한 수많은 이미지들 중 일부를 선별한 후 이들을 평평한 원목 판 위에 배치하고
조합하는, 즉 2차원 평면을 쌓아 3차원으로 구축해 나가는 소조 작업이다.
이 또한 채집된 이미지들
사이에 특정한 내러티브나 구체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즉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미지 덩어리를 빼고
더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거쳐 탄생한다.
최근 권오상은 20세기 영국의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조각에 영감을 받아 조각의 추상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헨리 무어 조각에 나타나는 인체가 완전히 분해되어 있는 형태나 구멍이 있는 형태들을 연구하며, 이를 기존의 사진조각 작업과 연결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발전시켰다.
헨리 무어의 조각을 오마주한 와상 조각 〈기대어 누운 형상〉(2020-) 시리즈는
추상적 형체와 유기적 구성에 기반한 독특한 인체 사진조각 작업이다. 추상적인 조각의 형태 위에 배치된
사진 이미지들은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거나 시점이 중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정지된 형상에 시각적 역동성을 부여한다.
인화지를 붙여 제작하던 기존의
사진조각과 달리, 〈기대어 누운 형상〉 시리즈에서는 무광 패브릭에 이미지를 프린팅하여 사용함으로써
조각의 질감과 형태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나아가 조각 안에 공기를 주입해 형체를 부풀리고 고정시킴으로써, 그의 초상 조각은 전시 공간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는 거대한 조각 설치의 형태로 변주되기도 한다.
이처럼 권오상의 작업은 조각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는 핵심 목표 아래 지속해서 서로 다른 연작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유기적으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왔다. 조각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탐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며 동시대성을 반영한 조형 실험으로
이어져 왔다. 권오상의 다양한 조형 실험들과 매체 간의 절묘한 융합은 예술의 경계를 지속해서 확장하며
조각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해오고 있다.
“나는 정말 인류가 어떻게 조각을 하면서 살아왔는가와 같은 보다 근원적인
조각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권오상, 작가 노트)
권오상 작가 ©리움미술관
권오상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부 졸업 후 동대학원 조소과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롯데 에비뉴엘 아트홀(서울, 2023), 일민미술관(서울, 2022), 수원시립미술관(수원,
한국, 2022), 아라리오갤러리(서울, 한국, 상하이, 중국, 2016) 등에서 개인전 및 협업전을 개최하였으며 에르메스(시드니, 호주, 2016), 워터풀갤러리(뉴욕, 미국, 2016), 오키나와 현대미술센터(오키나와, 일본, 2015), 조이스파리(파리, 프랑스, 2014), 하다컨템포러리(런던, 영국, 2013), 맨체스터
아트갤러리(맨체스터, 영국,
2008) 등 세계 등지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한국, 2024; 2023;
2018; 2014; 2011; 2010), 경남도립미술관(창원, 한국, 2023), V&A 미술관(런던, 영국, 2023), 더샵하우스(홍콩, 중국, 2022), 대림미술관(서울, 한국, 2020), 국립현대미술관(서울, 한국, 2015), 싱가포르
현대미술관(싱가포르, 2014), 사치갤러리(런던, 영국, 2010) 등의
기관이 연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