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준(b. 1971)은 1990년대 밴드를 결성하며 대중음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 네덜란드의 전자악기 연구개발기관인
스타임(STEIM)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현재
다양한 기술을 접목시킨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소리’와 ‘로봇’은 기술적인 차원에서 나아가 작가가 바라보는 동시대의 한국 사회를 투영하는 매체로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권병준, 〈이것이 나다〉, 2013 ©백남준아트센터
2011년 전자악기를 연구하고 한국에 귀국한 권병준은 소리의 확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에, 작가는 소리의 차원을 단지 청각적인 요소로 제한하지 않고
다양한 감각적인 요소들의 연출로써 소리의 전이와 그 리듬으로 확장시켜 이루어지는 다양한 조화의 양상을 실험하게 된다.
권병준은 이에 대한 실험으로 퍼포먼스 공연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그의 소리 장치는 악기에서 무대 속 다양한 장치들로 확장된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커미션으로 제작된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이것이 나다〉(2013)의 경우에는 작가 스스로를 미디어로 삼았다.
다양한 소리들이 레이어를 형성하며 공간을 채우고, 작가의 얼굴은
하나의 스크린이 되어 마치 가면을 쓰듯 마릴린 먼로, 조지 부시, 백남준
등 다양한 얼굴이 투사되며 작가의 얼굴이 완벽히 지워진다.
권병준은 이처럼 자신의 신체를 무대 위 다른 미디어들과
함께 위치시키며 소리 무대를 구성하는 작업의 연장으로, 이듬해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2014)을 선보였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홀로그램과 같은 첨단 기술 장치와 함께 물, 바람, 증기, 빛, 소리 등
자연 현상을 재료로 한 공감각적인 장치들이 융합되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다양한 장치들이 이루는 복합적인 환경 안에 권병준을 비롯한 퍼포머들이 위치하며 소리의 장(場) 속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그리고
이때 기계에서 뿜어 나오는 수증기가 작가의 얼굴을 대신하고, 퍼포머들은 극의 주체로서 두드러지기 보다는
소리의 전이와 확장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로서 사이사이에 위치한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약 10년 후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새로운 작업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으로
변주된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의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 이 작업에는 작가가 아닌 로봇이 등장해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퍼포먼스를 행한다.
로봇의 등장으로, 기술과 자연,
가상과 실상, 안과 밖, 우연과 계획 같이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요소들이 더욱 낯설고 기이한 풍경을 이루며 관객들에게 경계 바깥의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도록 한다.
2017년 권병준은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향한 한국 사회의 배타적인 태도를 마주한 것을 계기로, 가상의 이방인으로서의 로봇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GF(Golden Flower)’라는 이름의 외팔 로봇들을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했다.
이때 어떤 이는 겁을 먹고, 어떤 이는 구걸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차가운 손을 잡아주곤 했다. 작가는 손을 내미는
이 외팔 로봇들, 이방인과 같은 낯선 존재를 통해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속마음이 불쑥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GF’ 로봇들은 팔이 하나뿐인 반쪽짜리 로봇이다. 그러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빛을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고, 그렇게 두 개의 그림자가 만날 때 비로소 온전한 양팔로봇이 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인간 사회의 연대와 소통, 그리고 공존의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권병준의 로봇들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보통의 로봇과 달리 실용적인 어떠한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채춤을 추거나 오체투지를 하고 면박수련을 하는 등 오히려 아무 목적 없이 쓸모없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러한 목적성과 호용성이 없는 로봇들의 퍼포먼스는 자본의 논리 안에서 ‘쓸모’에 따라 가치가 결정지어 지는 현 시대에 대한 일종의 풍자극으로 다가온다.
권병준, 〈오묘한 진리의 숲 2〉, 2018,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전시 전경(서울시립미술관, 2018) ©서울시립미술관
소리의 확장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작업으로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가 있다. 2017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운드 아트 그룹전 “혁명의 TV로 방송되지 않는다”에서 처음 선보인 〈오묘한 진리의 숲〉은 위치 인식 헤드폰을 이용해 관객이 직접 걸어 다니고 움직이며 다양한 소리와 교감하는 일종의 ‘소리산책’ 작업이었다.
녹음하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 〈오묘한 진리의 숲 4〉(2019) 제작 사진 ©아르떼
이듬해 작가는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오묘한
진리의 숲〉의 두 번째 작업을 선보였다. 〈오묘한 진리의 숲 2〉(2018)는 제주도에서 채록한 예멘 난민들의 소리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위치
인식 헤드폰을 쓴 관객들은 처참한 전쟁 상황을 연상시키는 천둥 소리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위치마다 설정된 예멘 난민들이 경험했던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던
상황들을 환기하는 소리들과 예멘 난민의 노래를 듣게 된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된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는 예멘
난민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북한과 인접한 교동도의 소리풍경, 충남 홍성의 다문화가정에서 들려오는 자장가
등 우리 사회 속 다양한 소수자들의 소리를 채집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줘 왔다.
그리고 권병준은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개최된 “MMCA 청주프로젝트 2022: 도시공명”전에서 기존의 소리산책 작업을 더욱 확장시킨 〈청주에서 키이우까지〉를 선보였다. 〈오묘한 진리의 숲〉 시리즈에서
관객의 동선에 따라 특정한 위치에서의 사운드를 작동시키는 LPS(Local Positioning System) 기술을
사용했다면, 〈청주에서 키이우까지〉에서는 GPS 기술 중
하나인 RTK(Real Time Kinematic)를 바탕으로 한 입체음향 매핑 기술로 더욱 광범위한
오디오 증강현실을 만들어 냈다.
이 작업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한 태도로부터 비롯되었다. 권병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환경이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점차 개개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타자화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망각되어 가고 있는 비극의 현실을 소리를 통해 다시금 상기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권병준은 평화로웠던 옛 우크라이나의 풍경 소리와 함께 폐목재 공장에서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나 한국의
재건축 현장에서의 파괴적인 소음 등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을 유발하는 소리들을 채록했다.
〈청주에서 키이우까지〉에서 흘러나오는 현재의
상황과 대비되는 우크라이나의 소리는 평화로운 일상이 박탈된 그들의 현실을 더욱 극대화시키며, 한국에서
채록한 파괴적인 소음들은 그들이 겪어 왔을 불안과 공포를 관객들의 신체 감각적인 경험으로써 전이시킨다.
권병준의 작업은 어떻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나아가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투영한다. 그리고 이때 작가는 기술을 사용함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산물로 탄생한 기술의 문법을 거스르며, 우리 사회와 개인을 투영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가능케 하며 연대의 공동체를 꿈꾸게 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일 뿐이다.”
권병준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권병준은 1990년대 초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활동을 해오며 얼터너티브
록에서부터 미니멀 하우스를 포괄하는 6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2000년대부터는 영화 사운드 트랙, 패션쇼, 무용, 연극, 국악 등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활동했다. 이후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실험적인 전자악기 연구개발기관인 스타임(STEIM)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일을 해오다 2011년 한국으로
귀국해 현재까지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10년 그의 첫 개인전 “모든 것을 가진 작은 하나”(LIG 아트홀, 서울)을
시작으로 대안공간 루프(서울, 2018), 플랫폼 엘(서울, 2020), 부산시립미술관(부산, 2021)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한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일민미술관(서울), 히로시마
현대미술관(히로시마, 일본),
아르코미술관(서울) 등 국내외 다수의 기관에서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3”의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