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경(b. 1967)은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전통적인 조각 재료가 아닌 ‘비누’를 사용해 현재의 관점에서 특정 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유물과 예술품을 재현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과 주변 환경에 따라 형태를 잃게 되는 비누의 물성을 통해 세월에 의해 풍화되는 유물이나 예술품의 형태를 대응시킴으로써 문화와 역사가 지닌 ‘시간성’을 가시화한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비너스 프로젝트〉, 1998 (2009년 복원) ©국립현대미술관

신미경은 영국 유학시절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미술과 역사에 대해 배워왔지만 그 안에서 문화적 차이를 몸소 느끼게 된 작가는, 이를 계기로 21세기 아시아 작가로서 다양한 종교, 문화, 역사적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번역’을 보여주기로 한다.
 
그렇게 시작된 〈트랜스레이션〉 시리즈는 작가가 직접 본 유물이나 예술품을 비누를 사용해 재현하는 작업으로 전개되었다. 1997년 학교 본관에 진열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목욕하는 비너스〉 조각상을 복원가가 세척하는 과정을 보게 된 신미경은 조각상의 마모된 흔적에서 시간의 감각을 느끼게 되었고 본래 조각상이 놓여있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탈문맥화된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러한 탈문맥화하는 과정을 ‘유물화’라고 보았으며 이를 견고한 대리석과 상반되는 비누를 사용해 그 과정을 재연하였다.

〈트랜스레이션-웅크린 비너스〉 제작 과정 ©신미경

초반 〈트랜스레이션〉 시리즈는 원본 조각 옆에 비누 조각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다. 비누로 제작된 고전 조각들은 겉으로 보았을 때 얼핏 원본과 동일하지만 향기로써 둘은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2000년 이후부터의 〈트랜스레이션〉 시리즈는 더욱 의도적으로 원본과 복제 사이의 다양한 거리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가령, 작가 자신이 직접 원본 조각상의 자세를 재연해 자신의 신체를 석고로 캐스팅하여 비누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04-ongoing ©코리안 아티스트 프로젝트

2004년부터 작가는 비누 조각을 재료 자체가 본래 있던 공간, 즉 화장실에 설치하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이는 비누로 만들어진 불상이나 그리스 조각상 등 다양한 도상의 형태를 한 조각들을 화장실에 방문한 관객들이 직접 만지고 마모시키는 데에 가담하는 작업으로, 어느 문화관에 어느 문화적, 종교적 도상을 두느냐에 따라 2차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작업이다.

신미경, 〈화장실 프로젝트〉, 2004-2013 ©국립현대미술관

예를 들어, 불상 비누 조각을 불교신자가 많은 동양권 국가 화장실에 두었을 때 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하지만 서양권에서는 문제시 되지 않았다. 즉,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따라 같은 몰드에서 나온 비누 조각일지라도 다른 문화적 속성과 역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모된 비누 조각은 마치 역사적 유물처럼 다시 미술관에 전시된다.

신미경, 〈트랜스레이션-도자기〉, 2006-2013 ©국립현대미술관

2006년 런던 아시아하우스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트랜스레이션-도자기〉 시리즈는 화려한 장식적인 패턴이 두드러진 중국 도자기를 복제한 비누 조각 작업이다. 원본 도자기들은 17세기부터 서양으로 수출되었던 중국 도자기들로, 서양인들의 취향에 맞춰 더욱 중국풍을 띠도록 제작된 것들이었다.
 
신미경은 이로 인해 이 중국 도자기들이 ‘왜곡된 번역’의 과정을 갖는다고 여겨 이동의 과정을 나타내고자 도자기 비누 조각을 좌대가 아닌 운송용 목재 크레이트 위에 올려놓았다. 작가는 실시간으로 환경과 시간의 영향을 받으며 형태를 잃는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도자기 작품을 기존 박물관식 작품 설치 방식이 아닌 막 꺼낸 듯한 미완성의 설치를 함으로써, 유물이나 예술품, 그리고 박물관이 갖는 권위에 의문을 던진다.

신미경, 〈고스트 시리즈〉, 2007-2013 ©국립현대미술관

〈트랜스레이션-도자기〉 시리즈를 제작하며 비누라는 재료가 생각보다 그렇게 연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신미경은 그 내부를 파내어 유리처럼 보이도록 하는 작업을 구상하게 된다.

신미경은 표면의 디테일을 제거하고 도자기의 형태와 유리처럼 반투명한 색채만 남겨 견고한 물질성은 사라지고 최소한의 흔적만 남은 상태로 남긴 이 작업을 〈고스트 시리즈〉라 이름을 붙였다. 물질적 외피와 함께 문화적 맥락 또한 탈각된 도자기는 원본이 사라지고 어렴풋한 형태로만 남겨진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다.

신미경, 〈비누로 쓰다: 좌대 프로젝트(런던 카벤디쉬 광장)〉, 2012-ongoing ©국립현대미술관

2008년 작가는 우연히 공원에서 비어 있는 좌대를 발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야외 공공장소의 빈 좌대 위에 기존에 있었던 조각상을 비누로 제작하여 세우는 〈비누로 쓰다: 좌대 프로젝트〉(2012-)를 진행하게 된다.
 
작가가 발견한 빈 좌대 위에 있었던 기마상은 18세기에 영국왕 조지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전쟁영웅으로 추앙 받던 컴버랜드 공작을 기리는 기념상으로, 뒤늦게 스코틀랜드 학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남에 따라 철거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신미경은 약 4년간 컴버랜드 공작에 대한 자료를 추적하고 연구하여 옛 모습과 거의 동일한 비누 기마상을 다시 좌대 위에 세우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 일부는 정치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철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신미경, 〈비누로 쓰다: 좌대 프로젝트(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2013-2014 ©국립현대미술관

신미경은 원래 한점 뿐이었던 이 기마상을 지속적으로 복제해 세계 곳곳에 설치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비누로 다시 만들어진 역사적 기념비는 날씨와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풍화될 뿐 아니라 특정 장소와 역사적 맥락을 이탈하여 세계 곳곳에 편재하게 된다.
 
작가는 잊혀진 역사의 유령을 현재로 불러내 하나의 사건이 상이한 시공간 사이에서 다양하게 의미화되는, 즉, 박물관의 유물처럼 역사적 사실 또한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오역과 재해석을 반복해가며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물관을 다니면서 ‘유물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어떤 것도 그 유물을 만든 사람이 처음부터 유물이 되게 하려고 만든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만들었던 간에 시간이 흘러 땅에 묻히고 후대에 다시 발굴되어 그것이 박물관 선반에 올라갔을 때 유물이 되는 것이다. 유물이 된 다음에는 본래의 기능을 잃게 되어 무엇도 아닌 유물이 되는 것이다.
 
비누 조각도 마찬가지로 전시장에 설치되었을 때 비누의 기능을 잃게 되고 어떠한 맥락 안에 들어와 있는지에 따라 새로운 역사성을 갖게 된다.” (MMCA 작가와의 대화 | 신미경 작가)


신미경 작가 ©메종코리아

신미경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런던대 슬레이드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대학원 시절의 비누 조각 퍼포먼스가 주목을 받으며 졸업 후 1998년 영국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열린 전시에 초대받아 대영박물관의 그리스 조각을 비누로 만들었다. 이후 2004년 대영박물관 로비에서 비누 조각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최근에는 비누 뿐만 아니라 세라믹, 제스모나이트, 브론즈, 레진 등 새로운 재료에 대한 탐구 또한 이어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K,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성곡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국외에서는 중국 상하이의 학고재갤러리, 영국에서는 헌치 오브 베니슨 갤러리(Haunch of Venison, London), 벨톤하우스(Belton House), 브리스톨 시립박물관(Bristol Museum)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올해의 작가상' 4인에 선정되었으며, 2015년 싱가포르 푸르덴셜아이어워즈(Prudential Eye Awards) '베스트 신진 조각가상'을 수상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