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 미술이 국내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실험 미술’이 도대체 뭘까?
최근 한국 실험 미술이 여기저기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공동 기획했다. 해당 전시는 얼마 전 한국에서 전시를 마치고 미국으로 간다. 전 세계에 지점을 두고 있는 페이스(Pace) 갤러리의 뉴욕 지점에서는 8월 18일까지 이건용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고 리만 머핀(Lehmann Maupin) 갤러리 뉴욕지점은 9월에 성능경 작가의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국내외에서 한국 실험 미술이 조명을 받는다는 소식이 계속 들리고 있지만, 실험 미술이라는 용어가 생소한 이들에게는 이것이 도대체 어떤 미술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혹자는 실험 미술이라는 말을 들으면 난해하고 복잡한 미술일 것 같다면서 고개를 슬며시 돌리기도 한다.
한 작가는 1971년 경부고속도로변에서 뿌리째 뽑힌 나무를 가져다가 미술관에 세웠다. 이건용 작가의 작품 ‘신체항’(1971)이다. 김구림 작가는 기성 미술을 상징하는 미술관에 흰 광목천을 두르며 장례식을 치르는 퍼포먼스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를 선보였다.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 작가는 여성의 육체를 판타지적으로 해석하는 남성의 시각을 드러내기 위해 관객에게 누드에 부착된 투명 풍선을 터트리도록 한 참여형 퍼포먼스 ‘투명 풍선과 누드’(1967)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고 누군가는 ‘이것도 미술인가?’ 하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울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작품들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언론들은 ‘기이하고 미친 짓’ 같다거나 ‘웃기다’는 평을 했고, 심지어는 작품에 관심을 주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실험 미술의 등장 배경과 의의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러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험 미술은 혁신적이고 급진적이라는 뜻의 ‘아방가르드’ 또는 ‘전위예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의 실험 미술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이라는 독특한 맥락 속에서 전개되었다. 실험 미술 작가들은 격변기 속에서 새로움과 혁신을 추구했고 사회 이슈에 참여하고자 했으며, 공연,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했다.
Installation view of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at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Courtesy of the MMCA.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한국 현대 미술사에 등장한 실험 미술은 특히 기성 미술 제도를 비판하며 전개되었다. 추상회화가 한국 미술계를 평정하던 시기 한국 실험 미술 작가들은 매체적, 형식적 그리고 내용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했다.
실험 미술의 매체는 기존 회화나 조각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오브제, 설치, 해프닝과 영상 등 새로운 매체와 형식을 사용했다. 내용적으로는 반이성, 반논리 그리고 반예술을 표방하며 기존의 가치나 질서에 저항하는 다다(Dada)적 정신을 이어 갔다.
최근 한국 실험 미술이 주목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한국 실험 미술이 한국 현대 미술사라는 큰 흐름 속에 존재하는 단절을 메우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한국 실험 미술은 사실 오랫동안 한국 현대 미술계에서 간과되어 왔다. 한국 실험 미술은 최근까지도 하나로 정리되지 못했다.
한국 현대 미술사의 포문을 열었던 추상회화의 한 흐름인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운동은 한국 미술계를 휩쓸며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 실험 미술 이후에 나타난 단색화 또한 오랫동안 한국 미술계를 평정했다. 하지만 그 사이, 한국 실험 미술이 등장했던 시기는 혼미했던 시기, 단절의 시기 또는 미술계의 침체기로 불려 왔다.
그 이유는 한국 실험 미술이 추상회화 운동이었던 앵포르멜 운동과 단색화 운동처럼 국가의 지원과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실험 미술은 오히려 온갖 억압과 무시를 받으며 겨우 겨우 펼쳐졌다. 자연스럽게 큰 단체 활동 없이 소집단이나 개인이 이끄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대개 단발성으로 이어졌다.
왜 한국 실험 미술은 오랜 기간 눈길을 끌지 못했을까?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은 군사 정권과 유신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정부는 반정부적 의사 표현과 더불어 학내 대학생들의 행위와 학문의 자유에 제약을 거는 등 표현의 자유가 억압했다. 이러한 시기에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던 기성 미술 제도를 비판하고자 했던 한국 실험 미술은 불온 미술로 낙인찍혔고 이들의 활동은 강하게 통제되었다.
경제 발전을 추구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식량 부족 문제와 같이 궁핍한 경제적 상황과 함께 국가의 억압 등의 문제를 동반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미술 형식에 대한 대중의 몰이해를 낳았다. 당시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내려 실험 미술 전시가 이뤄질 수 있는 장을 봉쇄하고, 전시가 열렸더라도 관객의 주목을 받을 방법을 차단했다. 따라서 이들은 기성 미술 제도에 저항했지만 적극적인 정치 성향을 표현하며 결속력을 갖고 집단의 형태로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저항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앵포르멜 운동이 그랬듯 한국 실험 미술도 사실 서구 문화권을 비롯해 일본의 다양한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한국 실험 미술 작가들은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국전을 필두로 한 제도권 미술계에 저항하며 서구의 ‘옵아트’, ‘팝아트’, ‘네오 다다’ 등을 흡수하고 이를 한국 미술로 맥락화하여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