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술 무대라는 큰 좌표 안에서 한국 실험 미술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한국 실험 미술의 국제적 영향 관계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Jung Kangja, 'Kiss Me,' 1967/2001. Mixed media, 47 1/4 x 78 3/4 x 9 11/16 in. (120 x 200 x 50 cm). ARARIO collection. © Jung Kangja/ARARIO Collection, courtesy Jung Kangja Estate and ARARIO Gallery. Photo: Han Junho.

한국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젊은 작가들은 회화가 아닌 다양한 오브제와 행위 예술을 결합한 작품을 활발하게 제작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오랜 기간 하나의 경향으로 묶여 다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미술계는 이 시기를 ‘과도기’ 또는 ‘혼돈의 시기’라고 불렀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전반기까지 진행된 앵포르멜(informel) 회화 시기와 그 후인 1970년대 단색조 회화 시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뤄져 있다. 반면 한국 실험 미술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하나의 미술 운동으로 묶여 인식되기 시작했다.

앵포르멜은 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작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 미술 운동이다. 앵포르멜은 1950년대 말부터 1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지배적인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듯 한국 미술계를 장악했던 앵포르멜의 영향도 결국에는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젊은 작가들이 앵포르멜이 이끄는 획일적인 미술 사조의 분위기에 지쳐 탈회화적 미술 양식을 시도한 것이다.


1-3. Lee Kun-Yong, 'The Method of Drawing 76-2,' 197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Lee Kun-Yong. Courtesy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이러한 실험 미술 작가들은 서양 문화권과 일본에서 행해지던 해프닝, 이벤트, 대지 미술, 개념 미술, 오브제 아트 등에 영향을 받아 개념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용 작가가 팔의 움직임을 활용해 그린 그림, 제4집단 그룹이 미술관의 장례를 치르는 퍼포먼스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빌딩 사이에 100여 미터 길이의 푸른 천을 한 줄로 매달아 바람을 작품으로 이용한 이승택의 ‘바람’(1971)과 같은 작품들이 그 예시다.

이러한 작품들은 한국이라는 맥락 안에서 제작되었지만 앵포르멜이 유럽의 추상 미술 운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처럼 한국의 실험 미술도 세계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당시 한국 작가들은 파리 비엔날레(Paris Biennale)와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Art Biennial) 등 해외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서양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습득했다. 하지만 이는 선택 받은 소수의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대부분의 작가는 국내로 유입된 일본의 “미술수첩(美術手帖) 또는 “미즈에(みずえ)” 등의 잡지 또는 주한 미군 부대에서 구할 수 있었던 “LIFE(라이프)” 또는 “TIME(타임)” 등의 지면을 통해 해외 미술을 접했다.


One of the covers of Monthly Art Magazine 'Bijutsu Techo.' © Bijutsu Shuppan-Sha, 美術出版社 (Tokyo, Japan).

한국과 일본은 복잡한 정치·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당대 실험 미술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한국의 실험 미술과 일본의 전위 미술이 주고받은 영향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회피해 왔다. 하지만 박미성 연구자는 한국은 사실상 “미술수첩” 또는 “미즈에”와 같은 일본의 정보망을 통해 들어온 세계 미술을 습득하고 수용했다고 언급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은 서양 현대 미술을 직접 접했다기보다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 실험 미술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 미술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와 미국의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아르테 포베라는 ‘가난한 미술’을 뜻하며 일상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삶의 맥락에서 예술을 바라보게 한 운동으로 과정 미술, 개념 미술, 환경 미술 등과 맥락을 같이하며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개념 미술은 완성된 작품보다는 미술가의 아이디어를 중시해 전통적 미술의 개념적· 물질 한계에서 벗어났다.

Installation view of Motonaga Sadamasa's 'Work (Water),' (1956), "Gutai: Splendid Playground,"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Courtesy of the museum.

무엇보다도 한국 실험 미술에 있어 일본의 구타이 미술협회(具体美術協會, 1954~1972년, 이하 ‘구타이’)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의 구타이 미술 운동은 1954년부터 1972년까지 요시하라 지로(Jirō Yoshihara)가 이끌었던 운동이다. 일본 젊은 작가들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인 구타이 운동은 일본 미술의 국제적 연관 고리를 정립하고 해외에서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으며, 실제로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세계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2013년에 대규모 구타이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다.

구타이 미술 또한 서양의 개념 미술에 영향을 받아 몸짓을 동반한 회화(gestural painting)와 퍼포먼스 및 물질성을 오가며 이른바 반예술 운동을 펼쳐 일본 미술 담론에 변화를 가져왔다. 구타이 미술의 주요 특징으로는 정치적 행위로서 미술을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예술 행위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박미성의 논문 ‘1960년대 한국의 오브제. 행위 미술과 일본 구타이 미술의 관계’는 구타이 미술과 한국 실험 미술의 유사성을 간단하게 살펴본다. 예를 들어 한국의 청년작가연립전(1967년 12월)의 참여자들이 현실 참여적인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들고 진행했던 가두 시위 행진은 구타이 그룹의 일원인 규슈하(Q) 그룹의 1957년 가두 행진의 모습과 유사성을 보인다고 짚었다. 그 밖에도 이승택 작가의 1970년도 작품인 ‘바람’ 시리즈와 모토나가 사다마사(Sadamasa Motonaga)의 야외 작업인 ‘워터(Work-Water, 1956)’의 유사성도 설명한다.

Lee Seung-taek, ‘Wind-Folk Amusement,’ (1971). Courtesy of Lee Seung-taek, Asian Culture Complex and Gallery Hyundai.

이와 같이 한국 실험 미술과 일본의 구타이 미술은 비슷한 측면이 있으나 사실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일본의 구타이 미술이 순수하게 미술을 강조한 작업인 반면에 한국은 한국 미술계와 국가 정책에 대한 사회 비판 의식이 담겨 있다.

한국 실험 미술 운동은 다양한 미술 운동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어느 특정 양식만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60년대 중후반에 들어 한국에 나타난 오브제 미술과 행위 미술 등은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기 위해 다양한 미술 양식을 수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아직 한국 실험 미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고 한국 실험 미술이 글로벌 미술 관계에서 어떠한 영향 관계를 맺고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하지만 앞으로 국제 미술 무대라는 큰 좌표 안에서 한국 실험 미술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 실험 미술의 국제적 영향 관계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해당 시리즈는 다음 주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