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을(b. 1954)은 드로잉이라는 매체의 협소한 정의와 형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경계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여오며 주목을 받았다. 김을은 드로잉을 형식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태도로 인식하고 작업을 수행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자유롭고 솔직한, 그리고 양심에 어떠한 가책이 없는 어떠한 태도이다.

Kim Eull, Myself, 1997 ©MMCA

대학에서 금속 공예를 전공한 작가가 순수 미술로 전향하며 처음으로 착수하게 된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진 방대한 양의 〈자화상〉 시리즈는 1998년 작업실 화재로 인해 대부분 불에 타서 사라지게 되어, 초기작업은 현재 두 점만이 남아 있다. 그 중 하나인 〈나〉(1997)는 눈을 감은 채 상념에 젖어 있는 작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실루엣에 유화 물감을 입힐 수 있도록 화학 처리한 동판 조각들을 콜라주 방식으로 채웠다. 작가가 초기작업부터 즐겨 사용한 동판은 그의 학부 전공인 금속공예와 관련이 있다.

작품에서 판넬 위에 유화, 동판 등이 부조적으로 겹겹이 쌓여진 두터운 마티에르(Matiere)는 강한 물질성으로 현실과 세계, 존재와 실존에 무게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깊이를 전달해 준다. 최진욱은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화면으로써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비롯한 사회와 세계에 대한 관심을 꾸미지 않은 소박함과 순수함으로 표출한다.

Installation view of “#265 Okha-ri” at Project Space Sarubia in 2002 ©Project Space Sarubia

김을은 자신의 얼굴을 무수히 그려내면서 그 안에 조상들의 얼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부터 그는 ‘나는 어디서부터 왔고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삼으며 자신의 가족사를 그림으로 펼치는 ‘혈류도’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의 개인전 “옥하리 265번지”를 끝으로 그의 ‘혈류도’ 시리즈가 마무리되었다. 전시 제목인 ‘옥하리 265번지’는 김을이 태어나고 성장한 종가집 주소이다. ‘혈류도’ 시리즈는 5대에 걸친 가족들의 초상, 종가집, 선산, 토지, 지적도, 혈류도, 지도그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Kim Eull, Galaxy, 2003-2016 ©MMCA

그러나 김을은 〈자화상〉과 〈혈류도〉를 작업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담아내지 못한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작가가 선택한 것은 바로 드로잉이었다. 그에게 자신과 관련된 외부세계와 자신의 내면세계 등 다차원의 세상사를 자유롭게 다루는 데에는 드로잉이 적합했다.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형식이 자유로워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많은 양의 작품을 빠르게 제작할 수 있다는 드로잉의 특성이 그의 예술적 태도와 부합했던 것이다.
 
이전 회화 작업은 작가 의식과 시대의식, 삶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었다면, 2002년부터 시작된 그의 드로잉 프로젝트는 좀더 느슨해지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그리기의 유희를 보여준다. 그의 드로잉 작업에는 분명한 주제의식이 없고, 대신 그 당시 작가의 내면적 감정과 사유, 주변적 얘기, 어떤 사건, 그림의 문제의식들이 마치 일기처럼 유연하게 그려져 있다. 김을의 드로잉은 자신의 온 몸으로 대면하고 있는 거대한 세상에 대한 민감한 반응의 결과다. 2016년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위해 제작된 〈갤럭시〉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의 드로잉 1,232점을 벽에 거대한 우주의 형상으로 설치한 작업이다. 마치 우주의 탄생 과정처럼 그의 드로잉들은 특별한 목적 없이 어느 순간 종이 위에 그려져 나가다가 무수히 모여 마치 우주처럼 공간을 점유한다. 관객이 보는 이 우주의 형태는 순간적으로 머문 작가의 사고들을 모두 종합한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Kim Eull, Twilight Zone, 2012 ©Kim Eull

〈비식별역〉 시리즈는 김을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작업 중 하나다. ‘비식별역’은 ‘Twilight Zone’을 번역한 것으로, 사전상으로 빛이 도달하는 바다 속 가장 깊은 층, 중간 지대(상태), 경계 불분명 지역, 여명의, 황혼의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서 존재가 언어로 명명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상태이자 비결정적이고 가변적 상태, 경계가 지워진 중간 지점의 상태를 의미한다. 작가는 바로 그 불분명한 중간지대에 서서 세상을 보다 다차원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드로잉으로 자유롭게 담아내고자 한다.

Kim Eull, Twilight Zone Studio, 2016 ©MMCA

이러한 작가로서의 태도, 드로잉을 통한 지향점 등 그의 내면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김을은 미술관 안에 자신의 작업실을 구현하여 관객을 초대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선보인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는 생계를 위해 목수 일을 해왔던 작가가 직접 지은 2층짜리 건물이며, 일층은 작업실, 이층은 살림집으로 이루어진 당시 작가가 실제로 살고 있던 집 그대로를 재현해 놓은 설치 작업이다.

작가에게 이러한 집짓기는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으며 그 작업 과정 안에는 삶의 지향점과 태도가 그대로 녹아 있다. 무엇이든 상상하고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중간지대로서의 그의 드로잉이 공간으로 확장된 셈이다.

이처럼 김을은 삶의 태도로서의 드로잉을 단지 종이 위에 그리기 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설치 등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2022년 OCI미술관에서의 개인전 “김을파손죄”에서 작가는 “Drawing is Hammering(드로잉은 두드려 깨는 것)”이라는 문장을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문장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에게 드로잉은 단지 결과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어떠한 행위를 담지하는 태도이다. 그는 언제나 중간지점에 서서 묵은 생각의 틀을 깨부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나의 드로잉은 잡화다. 의도하지 않은 특별한 주제가 나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소한 것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 나의 정신도, 인생도, 세계도, 심지어는 우주도 잡이니 잡화가 차라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용도 형식도 뒤섞여 있지만 사시현상에 주의만 한다면 가히 볼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김을, MY GREAT DRAWINGS, 『김을 드로잉북』. 2011, pp.4~5.)


Artist Kim Eull ©MMCA

김을은 원광대학교 금속공예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서 귀금속 디자인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김을파손죄”(OCI미술관, 서울, 2022), “BTP”(스페이스 자모, 서울, 2021), “이중섭미술상 수상개인전”(조선일보 미술관, 서울, 2018), “Twilight zone Studio”(KUNSTRAUME, 쾰른, 독일, 2018) 등이 있으며, “Beyond time & space”(성남아트센터, 성남, 2021),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개관전”(국립현대미술관, 청주, 2019), “러닝 머신”(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13)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