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진욱(b.
1956)은 자신 주변의 사물이나 환경을 비롯하여 작가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의 모습을 ‘감성적
리얼리즘’이라는 작가만의 예술 언어로 지난 40여년 간 회화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에게 있어서 ‘리얼리즘’이란 사조적 의미나 방법론적인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단 세계와 작가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느낌을 화면에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다.
최진욱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로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리얼리티에 접근하기 위한 매개체로 ‘감각’을 제시한다. 즉,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이해가 아닌 ‘느낌’의 대상이다.
20대 후반 작가는 회화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작업을 해왔다. 당시 그가 그린 수많은 소묘 습작들은 소묘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눈 앞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어내는 최진욱만의 현대적인 구상화를 확립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최진욱의 현대적 구상화에 대한 실험 중 하나인 1980년
초부터 시작된 〈자전거〉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관찰 범위에 있던 ‘자전거’라는 대상을 반복해서 그리는 작업이었다. 이 시리즈는 동일한 대상을 그리는 작업이지만 각도, 조명, 채색, 붓 터치, 화면구성
등 화면을 이루는 요소들은 전부 상이하다. 〈자전거〉 시리즈에서 관객에게 제시되는 것은 자전거라는 사물 그 자체기보다는 그려진 당시 작가와 대상 사이에서
형성된 그때마다의 상이한 감정, 이미지, 분위기이다.
1986년
이후 작품부터는 자전거, 우산, 형광등, 선풍기와 같이 일상적으로 친근하고 도시생활의 편리한 도구들을 그린 작품에서 느껴지던 깨끗하고 완결된 인공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1984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가 당시 사회의 모순과 착잡한 현실을 마주하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회화 작업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며 시작되었다.
1986년작
〈책꽂이〉에서부터 주관과 객관, 감정과 대상 사이의 안정적인
균형 상태가 흔들리며 긴장된 감정의 물결이 화면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일상 속 소재를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그가 담은 대상의 모습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칙칙한 색감이
등장하고 굵고 역동적인 붓의 터치가 등장하는 등 작가의 감정적인 표현이 개입되어 있다.
1987년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에는 후기인상주의의 과학적인 조형방법이나 큐비즘을 연상시키는 듯한 강렬한 색채분할법이 나타나기도 한다. 복합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된 당시의 회화는 보다 촉각적이고 역동적이며 감정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적인 표현은 작가가 이전부터 견지해온 사물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즉 물체가 이끄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조형의 문제에 대한 확신을 얻은 시기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미술 행위와 개념에 대한 철저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최진욱은
때때로 사물의 형태를 빌어 은유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면에 그려 넣기도 하는 등 ‘생각하는 자신’을 그림에 결합시켰다.
화가로서의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 중 하나인 〈생각과 그림〉(1990)은 특정한 사물에
대한 시각에서 나아가 화실 전체로 시야를 확장한 작업으로, 실제 화실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화면으로 구성된다. 또한 작품 안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가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ㄴ'자로 엇물린 캔버스에 울퉁불퉁하게 요동치는 붓 터치들은 화면전체에
활기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 흑백으로 제한된 색조는 작가의 문제의식에 집중하게 해준다. 그리고 붓 터치가
하나하나 느껴지도록 그려져 그림 그리기의 흔적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Choi Gene Uk, Artist and Death, 1995 ©Arko Arts Archive
〈생각과 그림〉과 같은 당시 그림들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과 대상들을 함께 그림으로써 화가와 그림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드러냈다면, 1995년에 제작된 〈화가와 죽음〉에서는 화가와 그림의 이중적 관계에 더하여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장면을 그린 그림 옆에 화실에서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서로 거울처럼 상대하도록 배치함으로써 그림과 세계의 이중적 관계를
추가하고 있다.
〈화가와 죽음〉은 비무장지대(DMZ)를 주제로 하는 전시에 참여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오른편에는 당시 한겨레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무장 탈영병 사살 장면을 담은 그림을, 왼편에는 작업실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작가는 〈화가와 죽음〉에서 처음으로 초록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잔혹한 장면의 보색으로 선택한 이 초록색은 평화의색인 동시에, 붉은색을 뇌리에 더 선명하게
새기게 하는 효과를 준다.
Choi Gene Uk, Little by Little, 2013 ©Choi Gene Uk
작가는 청년 실업, 주거 불안정, 남북 분단, 노동 분쟁 등의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것은 물론
정치적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해 왔다. 그러나 최진욱의 그림에는 그러한 주제들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오로지 ‘은유’를 통해 현실과 미술을 연결시킨다.
길이 5m의 거대한 캔버스에 제작된 〈서서히〉(2013)는 공동묘지에서 치른 친구 부친의 장례식을 사실적으로
그린 옛 작품에 검남색, 청록색, 노란색 등 비현실적인 색감을
추가하여 다시 그린 작품이다.
장지에서 관을 조심스럽게 내리는 행위를 담고 있지만, 작가에
따르면 ‘구시대에서 새 시대로 바뀌는 것은 서서히 이뤄질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당시 작가는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희망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일상의 풍경인 장례식을 구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희망이 엇갈리는 정치적 사건으로
변모시킨다.
이처럼 정치적 의제를 다루면서도 은유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해, 최진욱은
‘감성적 리얼리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에 따르면, 실재는 무한하기에 유한한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직설적인 묘사는 관계를 왜곡하고 감상자가 사유할 기회를 빼앗기에, 작품은 진실을 직접 보여주는 존재가 아닌 감상자가 다양한 관점으로 진실을 찾게 만드는 수수께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진욱은 화가로서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은유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비극에 얽매이지 않고 이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선 사람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그림에 있다.”
Artist Choi Gene Uk ©CNB Journal
최진욱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회화전공을 졸업했다. 그는 인디프레스(서울, 2020), 일민미술관(서울, 2011), 아트 스페이스 풀(서울, 2008), 아르코미술관(서울, 2005)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리얼디엠지프로젝트(철원, 서울, 2015), 미디어시티서울 2014(서울, 2014), 제4회 광주비엔날레(광주, 2002), 퀸즈미술관(뉴욕, 1994)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한 바 있다. 그리고 2021년까지 추계예술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References
- 아트인컬쳐, 은유의 리얼리즘, 2024.04.04 :
- 아르코예술기록원, 최진욱 (Arko Arts Archvie, Choi Gene Uk) :
- 국립현대미술관, 최진욱 | 생각과 그림 | 1990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Choi Gene Uk | Thoughts and Painting | 1990) :
- 구글아트앤컬쳐, 최진욱 ‹화가와 죽음› (Google Arts & Culture, Choi Gene Uk, “Artist and Death”) :
- 아트바바, 인디프레스 서울 “최진욱 개인전 : 서서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