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서용선(b. 1951)은 인물, 풍경, 역사, 전쟁, 신화 등 다양한 범위에 이르는 주제들을 다루지만 특히 도시의 인간군상을 그려내는 연작들과 역사 속의 사건들을 시각화하는 역사화 연작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용선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역사 속 사건들과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다루며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탐구를 시도해왔다.

그리고 이를 ‘물질-환경(자연)-신화’라는 3개의 항으로 확장하고, 세계사적 보편성의 관점에서 동시대적 삶의 조건과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다. 서용선은 이러한 주제들을 폭넓게 다루며 탄탄하게 구조화된 평면과 강렬한 색채 표현을 통해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를 특유의 조형언어로 승화시킨다.

Suh Yongsun, Inquiry, No Ryang Jin, Mae Wol Dang, 1991 ©MMCA

서용선은 1980년대 초 소나무 작업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려왔다. 사실적인 동시에 전통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작가의 소나무 풍경화는 실제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기보다는 소나무라는 개념과 형태 인식을 통한 지각적 감각의 경험을 풀어나가는 작업이었다. 그후 작가는 1986년경 우연히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단종에 대한 역사화 작업인 ‘노산군 일기’ 시리즈를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해왔다.

작가는 우연히 방문한 청령포에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가서 채 스물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의 비극적인 인생을 마주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룬 미술 작품이 없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서용선은 이내 직접 나서서 자료를 수집하고 사방으로 흔적을 찾아다니며 이를 화폭에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역사화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이나 권력과 얽혀 있는 등 작가의 해석이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아, 한국 현대미술안에서는 드물었다.

그러나 서용선은 이러한 기존의 역사화의 성격이나 목적과는 정반대로, 단종에 대한 역사적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권력욕, 야만성, 비극성 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가령, 〈심문, 노량진, 매월당〉(1991)은 단종일기에 등장하는 복합적인 상황을 한 화면에 집약하여 분할된 형태로 나타낸 작품으로, 서용선만의 강렬한 색채와 표현법을 통한 주관적 해석과 주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

Suh Yongsun, City – in the Bus, 1989, 1991 ©Korean Artist Project

이러한 역사화 작업 뿐 아니라 작가는 당시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주목했다. ‘도시인’ 시리즈를 시작한 1980년대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며 서구의 상업적인 대중문화가 유입되던 시기였다.

작가는 빠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던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을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관찰하였고 그들의 권태로운 표정과 대비되는 강렬한 원색의 색감으로 담아냈다.

동시에 작가는 코카콜라(Coca Cola) 상표나 맥도날드 간판 등 당시 한국 사회의 변화에 대한 흔적을 화폭에 남겼다. 그리고 이후 서용선은 서울을 벗어나 베를린, 베이징, 맨하탄 등 다른 나라의 대도심을 돌아다니며 그 풍경 속 현대인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아냈다.


Suh Yongsun, Potsdam Conference, 2012, 2015 ©Korean Artist Project

또한 서용선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 6.25 한국전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현실이기도 하며 전쟁 중에 태어난 서용선 개인의 역사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작가는 한국전쟁의 시발점이 된 냉전의 서막을 알린 ‘포츠담 회담’부터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사건, 그리고 휴전 이후 남북한의 긴장과 완화가 반복되는 일련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작가는 이러한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치던 민간인, 포로, 어린 군인과 같은 인간상에 주목해왔다. 또한 작가 본인과 가족의 기억에서 꺼내 온 직접 겪은 전쟁 도중과 직후의 상황을 다루고, 전쟁을 겪은 또 다른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서용선은 한국전쟁에서 출발하여 일제강점기, 계유정난 등 공동체의 비극의 역사를 그림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을 해왔다.


Suh Yongsun, Mago, 2009 ©Suh Yongsun Archive

이후 서용선은 인류의 역사를 넘어서 인류의 시원에 대한 신화를 작품 주제로 삼았다. 2004년 서용선은 동양의 신화와 관련된 신문 연재물에 삽화를 그리게 되면서 한국의 신화에 대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작가에게 신화는 신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재적 삶이 투영된, 지금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으로 작가가 지속적으로 다뤄온 ‘마고 신화’는 한국 토속 신앙에 등장하는 대지의 신이자 창조신인 마고가 천지를 만들어 내고 한민족을 탄생시켰다는 내용의 창세신화이다. 작가는 시각적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해 마고 신화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마고 신화를 주제로 한 조각, 드로잉,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Suh Yongsun, Self-Portrait, 2023 ©Topohaus

서용선은 그림을 배우던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자화상을 그려왔다. 작가는 자화상을 그리는 순간 실패하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선을 긋는 순간부터 자신의 얼굴 생김새와 멀어지게 되고 계속해서 실패하게 되는 그림이지만 어떻게든 계속 그리게 된다는 점에서 시지프스 신화와 닮았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계속 그리는 이유는 자화상마다 그 안에 조금씩 다른 지점들이 남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말처럼 서용선의 수많은 자화상 시리즈에는 크고 작은 차이들이 드러난다. 캔버스 앞에 당당하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자화상은 점차 세상을 응시하고, 대면하고, 좌절하며, 받아들이며, 또한 흥분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 모습은 격렬하게 그리는 행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자화상 작업을 통해서 자신은 해체되고 다시 결합되며 새롭게 탄생한다. 그의 자화상은 단지 작가 자신에 대한 작업만이 아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그의 작업 전반에 기반이 되는 기본 작업이기도 하다.

"작품의 기능은 작가와 관객의 대화이고, 나아가 관객과 관객 간의 대화가 이뤄짐으로써 궁극의 완성에 이릅니다. 한편으로 그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그려 보입니다. 어찌할 바 모를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면 그 당혹감이 사그라지는 체험을 하는데요.

관객에게 전하려는 예술적 카타르시스(정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얼굴에 붉은색을 써도 괜찮다는 제 신념처럼 이 현실과 사회에 대한 반응, '그래도 괜찮다'는 위안과 자극, 그런 태도로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것. 그게 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입니다."


Artist Suh Yongsun ©Seoul Economic Daily

서울에서 출생한 서용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리고 1986년부터 2008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역임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New Works”(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2024), “내 이름은 빨강”(아트선재센터, 서울, 2024), “서용선의 마고이야기, 우리 안의 여신을 찾아서”(서울여성역사문화공간 여담재, 서울, 2021), “통증·징후·증세: 서용선의 역사 그리기”(아트센터화이트블럭, 파주, 2019) 등이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2009 올해의 작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을 포함한 세계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