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호(b. 1975)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현실을 드러내고 환기하거나 비현실을 만들어내는 등 이미지의 재현과 재연이라는 예술에 대한 심오한 탐구로서의 작업을 이어 왔다. 이를 위해 이명호는 ‘사진-행위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며 사진 예술에 대한 담론과 더불어 색다른 예술적 경험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명호, 〈나무…#1〉, 2007 ©갤러리현대

이명호는 2004년부터 자연에 대한 경의와 이미지의 재현 혹은 재연에 대한 탐구로서의 사진 작업 ‘사진-행위 프로젝트’를 이어 오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업이자 그의 대표작인 〈나무〉 시리즈는 나무 뒤에 하얀 캔버스를 세우는 연출을 통해 나무라는 대상을 본래 자연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대상 뒤에 배경 막을 치는 것은 스튜디오 사진의 오랜 전통으로도 보이는 동시에 그렇게 완성된 사진 이미지는 마치 서양 미술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거대한 자연의 일부였던 나무 한 그루가 캔버스 위에 새겨진 이차원적 이미지로 평면화 됨으로써, 배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대상으로서 두드러지게 된다.

이명호, 〈나무…#2〉, 2007 ©갤러리현대

이러한 ‘사진-행위 프로젝트’는 캔버스로 인하여 마치 피사체가 재현된 이미지처럼 전환됨에 따라 기존의 풍경 사진이나 정물 사진과 궤를 달리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피사체 본래의 형태와 존재를 변형하지 않은 채 단순한 설치 행위를 통해 현실을 재설정함으로써 개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사진의 재현 문제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이명호, 〈Mirage #1_Gobi〉, 2009 ©이명호

첫 번째 ‘사진-행위 프로젝트’로서 진행된 〈나무〉 시리즈는 사진의 ‘재현’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면, 그 다음으로 선보인 〈신기루〉 시리즈는 예술의 ‘재연’적 성격에 관한 담론들을 이끌어 낸다.

〈신기루〉 시리즈 또한 자연 속 어딘가에 하얀 캔버스를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다시 현실을 드러내는 작업으로서의 〈나무〉 시리즈와 달리 현실을 또 다른 현실로 치환한다.


이명호, 〈Mirage #4_Silk Road〉, 2011 ©갤러리현대

이명호는 황량한 사막에 커다란 하얀색 천을 설치한 다음 원거리에서 촬영함으로써 저 멀리서 넘실거리는 바다 또는 오아시스와 같은 신기루를 만들어낸다. 〈신기루〉 시리즈에서 하얀 캔버스는 실재 속 허구를 드러내는 환영적 시뮬라크르의 장치로 작동한다.

이명호, 〈유산 #3_서장대〉, 2015 ©갤러리현대

이명호는 ‘사진-행위 프로젝트’의 〈나무〉와 〈신기루〉 시리즈에서 자연 속 대상만을 카메라로 담았다면, 이후 발표한 〈유산〉 시리즈를 기점으로 인공물 또한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가령 〈유산 #3_서장대〉는 2014년 세계미술평론협회(AICA) 총회의 수원 개최를 기념해 의뢰 받은 작품으로, 수원화성의 서장대를 피사체로 하고 있다. 작가는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서장대 뒤에 하얀 캔버스를 두어 서장대 고유의 독특한 건축 형태를 섬세하게 드러냈다.

이후 작가는 2018년부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홍보대사로 선정되며, 각지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함으로써 그들의 가치와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명호, 〈Nothing But #1〉, 2017 ©갤러리현대

그리고 이명호는 2018년 갤러리현대에서의 개인전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에서 ‘사진-행위 프로젝트’의 세 번째 시리즈인 〈Nothing But〉을 발표했다. 이전 작업들은 하얀색 캔버스를 이미지의 재현 혹은 재연을 위한 장치로써 활용했다면 〈Nothing But〉에서는 자연 속에 그저 덩그러니 세워 둔다.  

이명호, 〈Nothing But #2〉, 2018 ©갤러리현대

무언가를 드러내거나 만들어내는 역할을 상실한 캔버스는 되려 제시하고자 하는 어떤 대상이 없기에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상태가 된다. 즉, 캔버스를 비움으로써 역설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Nothing But〉은 재현과 재연 그 사이 혹은 너머에 위치하며, 존재의 흔적과 실체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명호의 작업 세계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이명호, 〈9 Minutes' Layers #1〉, 2018 ©갤러리현대

〈Nothing But〉과 마찬가지로 하얀색 화면만을 드러내고 있는 〈9 Minutes' Layers〉(2018) 시리즈는 이미지를 소유하고 채집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과 허망을 반영하고 있다. 언뜻 비어 있는 하얀 백지가 액자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아주 흐릿한 프린트의 흔적을 담고 있다.

작가는 9분 동안 1분 단위로 10점의 사진을 촬영한 다음 포토샵으로 겹쳐 빛의 3원색(빨간색, 초록색, 파란색)이 섞이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모든 상이 사라진 듯 하얀색만이 남게 된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사진이란 빛을 채집하는 행위이지만 빛을 계속해서 채집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사진-행위’로서 드러내고 있다.

이명호, 〈나무 그리고 색_창원 #1〉, 2020 ©창원조각비엔날레

이후 이명호는 2020 창원조각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기존 ‘사진-행위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지는 캔버스 구조물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나무 그리고 색_창원 #1〉(2020)은 이전 작업 〈나무〉의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설치하는 기본 구조를 공유하고 있지만, 나무가 자라는 크기에 따라 5년 단위로 캔버스 크기를 확대하는 가변적이고 장기적인 프로젝트로서 진행된다.

또한 〈나무 그리고 색_창원 #1〉은 흰 캔버스 대신 홀로그램 페인트가 칠해진 철판이 설치됨으로써,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흐름과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의 모습뿐 아니라 전면에 반영되는 풍광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이명호, 〈섬_[드러내다] #1〉, 2020 ©고은사진미술관

한편 같은 해에 발표한 〈_[드러내다]/_[drənæna]〉(2020) 시리즈는 기존에 선보여 왔던 사진을 통한 ‘드러내기(나타나게 하기)’의 개념과 형식으로부터 상반되어 있는 ‘들어내기(사라지게 하기)’의 과정을 함께 담고 있다.  

이명호는 상반된 의미를 가진 동음이의어 ‘드러내다’와 ‘들어내다’의 발음 기호 표기인 [드러내다]/[drənæna]에서 착안하여 이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먼저 종이 위에 사진을 프린트하여 이미지의 상을 드러낸 다음 표면 위의 얇게 도포된 잉크를 의료용 메스와 돋보기를 이용하여 들어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지를 없애 버리는 ‘들어내다’로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한 겹의 표면 너머에 숨겨진 이미지의 속살을 ‘드러내다’로도 이해할 수 있는 중의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명호, 〈나무… #10〉, 2017 ©갤러리현대

이명호는 세상의 한 구석을 들추고 환기하는 일이 예술의 본질일 것이라 말한다. 그의 10여 년간의 ‘사진-행위 프로젝트’는 현실을 드러내거나 비현실을 만들어내고, 또는 그 너머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오면서 사진 매체를 통한 예술의 역할을 수행해 온 일련의 과정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그의 사진 이미지는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익숙한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환기시킨다.

“작은 캔버스를 하찮은 것들 뒤에 드리움으로써 자연에 묻힌 그것들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캔버스에 그것들을 그리는 대신 그것들 뒤에 캔버스를 드리우는 일 뿐이지만 예술 행위의 본래 뜻도 여기에 있다.

이 사람이 준 편지를 저 사람에게 전해주는 일, 내 어려서 꿈은 우편 배달부였는데 가장 단순하고도 말초적인 일이지만 동시에 아주 보람되고 내게 제일 알맞은 일이라 여겼다. 예술은 그 꿈의 다른 형태다. 세상의 한 구석을 들추고 환기하는 일, 이성과 감성을 객관화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내게 예술이다.”


이명호 작가 ©뉴스포스트

이명호는 중앙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였다. 작가는 사진비평상(사진비평상위원회, 2006), 내일의 작가상(성곡미술관, 2009) 등을 수상하며 탄탄한 입지를 쌓아왔고, 요시밀로갤러리(뉴욕, 2009/2017), 성곡미술관(서울, 2010), 갤러리현대(서울, 2013/2018), 사비나미술관(서울, 2017) 등 국내외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가장 최근에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2020), 장폴게티미술관(2019), 쿤스트 하우스 빈(2017), 국립빅토리아갤러리(2017), 서울시립미술관(2016) 등에서 개최한 전시에 참여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비롯하여, 장폴게티미술관, 암스테르담사진미술관, 국립빅토리아갤러리, 살타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