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희(b. 1971)는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요소인 점, 선, 면을 통해 음악과도 같은 리듬과 운율, 혹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색들의 운동감을 통한 유기체적인 추상회화를 지속적으로 선보여 왔다. 그의 회화 속 기본적인 표현요소들은 각각 서로를 반영하고 반응하면서 복잡하게 연결되거나 엇갈리고, 혹은 단절되면서 관계를 맺는다.

성낙희, 〈Untitled〉, 2006 ©성낙희

성낙희의 초기 작업에서는 점, 선, 면을 통한 유기체적인 움직임이 더욱 자유롭게 드러난다. 이러한 자유로운 흐름과 함께 뒤얽히는 색감들은 더욱 회화의 운동감을 증폭시킨다. 유기체와 같은 색형이 이루는 흐름을 따라 보다 보면 어느새 깊숙한 내면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된다.

성낙희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표현적 시각언어로 감성에 대한 공간을 암시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화면 속의 요소들은 작가 내면의 심리적 흐름을 따라 역동적으로 하나 둘 씩 쌓이며 조화를 이루고 균형 있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구조를 갖는다.

성낙희, 〈Frequency〉, 2006 ©성낙희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작가의 내면의 흐름에 맞춰 각각 하나의 세포처럼 증식하고 해체되고 변이된다. 이에 따라 작가의 추상적 형태들은 다채로운 변주를 이룬다. 가령 〈Untitled〉(2006)에서는 얇은 선들과 투명하고 굵은 붓터치가 겹쳐지고 얽힌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Frequency〉(2006)는 깔끔하고 부피감이 있는 굵은 선들의 얽힘으로 인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성낙희, 〈Passage〉, 2006, 제1회 싱가포르비엔날레 전시 전경 ©Universe in Universe. 사진: Haupt & Binder

또한 성낙희의 강렬한 색상과 운동감 넘치는 형태들은 평면에서 나와 3차원의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기도 했다.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려진 드로잉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밀도 있게 표현되었다면, 벽면 드로잉은 더욱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작가의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전시하는 공간에 맞춰 물감, 마커, 스프레이를 이용해 벽면과 바닥 위에 자신의 직관과 감성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그린다. 공간으로 확장된 유연하고 불규칙적인 추상적 형태들은 관객의 주위를 감싸며 보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감상에 이르도록 한다.

“between you and me” 전시 전경(두산아트센터, 2010) ©두산아트센터

혹은 이러한 성낙희의 벽면 드로잉은 그의 종이 드로잉들이 설치되는 벽을 이루기도 한다. 마치 작은 종이 드로잉 위에 그려진 색과 형태들이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온 듯한 모습을 이루며 더욱 다이나믹한 시각적 운율감을 만들어 낸다.

성낙희, 〈Polyphonic 5〉, 2016 ©성낙희

또한 성낙희의 작업들은 전시 타이틀 또는 작품의 제목들에 음악적 용어를 사용해오며 재료와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연주를 평면 위에 구축해 왔다. 예를 들어 〈Polyphonic〉 시리즈는 독립적인 멜로디가 둘 이상의 라인에 함께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룬다는 다성음악(Polyphony)을 제목으로 하듯이, 화면 위의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부드러운 화음을 이루고 있다.

그의 작업 과정은 직관적인 감수성에서 출발하지만 조화와 균형을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개입 또한 수반된다. 작가는 악보를 채우듯 불균형한 상황을 만드는 부족한 부분에 의도적으로 그려 넣으며 화면을 구축한다. 하지만 이는 찰나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변주와 서로 상이한 요소들의 엉킴으로 인한 개별적인 요소들 간의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성낙희, 〈Transpose 1〉, 2018 ©성낙희

한편 최근의 작품들은 이전과는 달리 큰 색면이 전면에 두드러지며 차분하고 정적인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에 대한 연구는 2018년에 선보인 〈Transpose〉 시리즈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Transpose〉라는 제목은 조를 옮기거나 바꾼다는 뜻을 가진 음악용어로, 이는 기존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는 변주가 아닌 그의 회화 세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변화를 모색했음을 유추하게 한다.

성낙희, 〈Transpose 11〉, 2018 ©성낙희

초기의 〈Transpose〉시리즈는 다소 경직된 듯한 직선과 곡선 사용이 두드러진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면적을 보다 과감하고 자유로운 분할과 배치가 나타나며 예측하지 못한 색의 조합과 붓터치의 흔적에서 오는 작가만의 위트를 감지할 수 있다.

성낙희, 〈Sequence 1〉, 2019 ©성낙희

이듬해에 선보인 〈Sequence〉(2019) 시리즈는 기존의 작업의 일부를 확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여러 색면의 층들이 쌓여가면서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매끄러운 형태의 디지털 픽셀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매끄러움 이면에는 유동적인 붓터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직선과 곡선이 결합된 형태의 붓터치는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사선으로 화면을 분할하면서도 곡선으로 굴절되며 유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또한 흘러내린 물감 자국과 의도적은 뿌려진 듯한 물감 자국 등은 정적인 화면 구성 안에 감춰진 운동감을 느린 속도로 미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낙희, 〈Sequence 3〉, 2019 ©성낙희

이전 작업들은 작가의 내재된 감각들을 외부로 발산해 나가면서 균형감을 바탕으로 채움과 비움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Transpose〉와 〈Sequence〉 시리즈에서는 작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 이전에 비해 공간적,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루어진 듯한 흔적들이 남겨져 있다.

작가에 따르면, 그는 요즘 작업을 하며 중력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유는 〈Sequence〉 시리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화면 속 구성요소들은 서로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기며 긴장감을 내재하고 있기 보다는 중력과 같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공존하고 있다.

“Modulate”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0) ©페리지갤러리

즉 성낙희의 근작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발산과 균형 잡기의 과정보다는 차분하게 주변의 물질적, 비물질적인 영향을 충분히 인지하고 느린 움직임을 통해 완성되어 나가는 데에 집중한 결과물로 보여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각각의 색면들은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서로가 이어지고 쌓임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페리지갤러리의 신승오 디렉터는 이에 대해 “결국 작가는 비물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힘을 자신의 내부와 연결시키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작품을 하나로 응축된 장면으로 완결 시킨다”고 덧붙였다.

성낙희, 〈Pivot〉, 2023 ©피비갤러리

한편 올해 피비갤러리에서의 개인전 “Short Sleeves”에서 선보였던 최근 1-2년간의 작업들은 곡선의 활용이 두드러지며 유기적인 율동감이 강조된다. 이러한 최근작들은 2018-2019년 작업들에서 엿볼 수 있었던 관조적인 태도와 기존의 동적인 흐름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음률적 심상을 구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신작들은 다이나믹한 에너지의 발산으로 인한 운동감보다는 고요히 물이 흐르듯 매끄럽고 유연한 색면과 자유로운 유기체의 형태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율동감이 특징적이다.


성낙희, 〈Portamento 31〉, 2024 ©피비갤러리

또한 작품명에서도 이러한 유유히 산책을 하는 듯한 절제되면서도 유동적인 심상이 느껴진다. 가령, 〈Portamento〉 시리즈는 어떤 음에서 다른 음으로 매끄럽게 옮겨가는 연주주법인 ‘Portamento’를 제목으로 하며 작가의 관조적이고 절제된 호흡과 합을 맞추는 듯한 형태들의 매끄럽고 유연한 움직임을 담고 있다.

성낙희는 이처럼 자신의 심리적 여정에서 출발하여 기하학적 요소와 조형적 모듈의 조합으로 구성된 독창적인 변주들을 통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와 시각적 균형을 만들어 왔다. 그의 회화 속 유연하게 서로를 관계하며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들처럼 그의 작품 세계 또한 세상과 자유로이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심리적 여정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재현한 것이다. 자유롭게 떠도는 표현은 보는 이의 시야를 움직여, 서서히 마음과 눈, 정신도 그림 속 흐름을 따라 깊숙이 공간 속에서 돌아다니도록 유도한다.” (성낙희 작가노트)

성낙희 작가 ©피비갤러리

성낙희는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런던 로얄 컬리지 오브 아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트선재센터, 두산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일민미술관, 밀라노현대미술관 등 주요미술관의 그룹전에 참여하였고, 2005년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뉴욕 두산 레지던시, 쌈지 레지던시, 파리 시떼 국제 레지던시 등 국내외 레지던시에 참여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LG, UBS 아트컬렉션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