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환(b. 1969)은 조각, 회화, 드로잉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작업과 함께 관객 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 영화
시나리오 등 여러 매체와 분야를 망라해 오며 한국을 대표하는 동시대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69년에 태어난 작가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1997년 IMF 외환 위기 등 한국
사회의 격변의 시기를 관통해 오며, 사회 전반에 드리워져 있던 허무주의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예술로써 다루어 왔다.
공사 현장에 버려진 나무나
깨진 병, 유행가의 가사 등 소박하고 대중적인 요소를 작품의 재료로 활용해온 작가는 한국 사회의 표면과
그 이면을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작가만의 시적인 조형언어로 담아냈다.
배영환의 초기 대표작인 〈유행가〉 시리즈는 1980-1990년대 대중가요의 가사를 알약(위장약, 두통약), 약솜, 본드, 깨진 술병 조각들로 적음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상과
감수성을 표현해낸 작업이었다. 이러한 하찮고 일상적인 재료들로 대중문화적 요소를 다룸으로써 그의 작업은
예술의 고상함보다는 실제 우리의 삶에 맞닿아 위로를 건네는 예술로 다가온다.
배영환, 〈유행가 - 크레이지 러브〉, 2006 ©국립현대미술관
작가는 “미술은 유행가처럼 위로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유행가〉 시리즈는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과 시름을 잊게 해주는 유행가나 진통제처럼 사회정치적 암흑기를 보낸 현대인들의 깊은 상처와 평범한 보통 이웃들의 삶을 위안하고 어루만진다.
2005년부터 선보인 그의 대표작 〈남자의 길〉 시리즈는 작가가 직접 주택가를 돌며 버려진 자개 장식장을 수집하여 실제 기타 제작 방식대로 제작한 재활용 기타 작품이다. 〈남자의 길〉은 1970-1980년대 통기타 세대 남성들의 초상인 동시에, 한때 청춘과 낭만, 저항의 상징이었던 통기타를 통해 이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다.
2008년 배영환은 깨진 술병 파편들을 이용한 설치 작업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소외된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은 샹들리에 형태의 작품으로, 그 위에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징후인 ‘불면’을 상징하는 초록색 부엉이들이 앉아 있다.
밤의 부산물과도 같은 버려진 술병 파편들과 LED 전구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럭셔리’와 ‘궁상맞음’이라는 상반된 의미가 중첩되며 한국 사회의 심리적 균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 작품으로써 작가는 불안과 걱정으로 잠에 들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들의 삶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배영환, 〈도서관 프로젝트 - 내일〉, 2009, 제주 여미지 식물원 설치 전경 ©PKM 갤러리
이처럼 배영환은 당시 한국 사회상과 현대인들의
심리를 일상의 재료를 통해 은유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이어온 동시에, 예술의 실천적인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실험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또한 진행했다.
예를 들어, 배영환은
서울 시내 노숙자 지원시설 정보를 담은 수첩을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배포한 〈노숙자 수첩 - 거리에서〉(2001)를 비롯해 청각 또는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 협업하여 벽화 작업을 제작하는 등 실험적이고 실천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그리고 2009년, 배영환은 컨테이너 및 모듈 형식의 도서관을 제작해 문화 소외 지역에 설치하는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도서관 프로젝트〉는 단지 형식적인 차원의 도서관이 아닌 실질적으로 이용 가능한 도서관을 짓는 작업으로, 공공의 차원 안에서 미술의 실천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험했던 프로젝트였다.
배영환은 2009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이 프로젝트의 개념적 초안을
제시하는 전시, 플랫폼 서울 2009: 배영환 도서관 프로젝트 “투머로우(來日[Tomorrow])”를
열었다. 전시는 주민들이 사용할,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을
위한 도서관 모델을 실제 크기와 다양한 형태의 모듈 조합으로 연출한 설치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가가
제시한 도서관 모델은 목재와 골판지를 이용하여 공작품처럼 친근한 소재로 제작되어 마을 주민들의 정서적인 문화공간으로 다가갈 수 있게끔 구성되었다.
2012년, 배영환은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개인전 “유행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개최하며 로댕의〈지옥의 문〉 앞에 가로, 세로 350cm 높이 150cm 크기의 황금색 링을 설치했다. 〈황금의 링 – 아름다운 지옥〉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사람들은 이 도시에 살려고
오지만 내가 보기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는 것 같다'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황금의 링 – 아름다운 지옥〉에서 ‘황금의 링’은 자본주의의 상징 중 하나인 ‘황금’과 복서들의 경쟁 무대인 ‘링’을 결합시켜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도시인들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올해 배영환은 7년 만에 개인전을 개최했다. 지난 5월까지 진행되었던 BB&M에서의
개인전 “So Near So Far”에서 작가는 〈유행가〉 시리즈와 연장선에 있는 새로운 작업 〈Mindscapes〉 시리즈를 선보였다.
〈Mindscapes〉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닐 영(Neil Young), 그리고 데이빗
보위(David Bowie)등 작가의 청년기에 자주 다녔던 청계천 노점상에서 불법 복제품으로 처음 접한
노래들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는 이를 기타로 직접 연주하며 수집한 자신의 뇌파 데이터를 3차원의 부조로 변환하여 투명한 물감층과 금박의 능선이 겹쳐진 형태로 제작했다.
이 작업은 ‘심상’ 즉, 마음 속의 형상이라는 산수화의 개념과 작가의 탐구가 연계된
결과물이다.
이처럼 배영환은 지난 수년간 현대 사회 속 개인의 삶과 불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과 징후들을 시각화하며 미술을 통한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온 작가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정치적 작동기제와 같은 구조적인 것보다는 그 안에서 부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개인들, 그리고 삶 속에서 실제 경험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우리 모두가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존귀함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세상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지요. 우리 모두가 같음이 아닌 다름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죠. … 초라한 우리 안의 존귀함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배영환은 서울시립미술관(2018),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6), 모리미술관(도쿄, 2013), 삼성미술관 플라토(서울, 2012), 민생현대미술관(상하이,
2010), 아트선재센터(서울, 2009), 뉴뮤지엄(뉴욕, 2009) 등 전 세계 유수 미술관 전시에 참여했으며, 광주비엔날레, 샤르자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등 국제적 프로젝트에 초대되었다.
주요 수상이력으로는, 2015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 최우수상, 2004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2년 광주비엔날레 현장상이
있으며, 2018년 APB시그니처 예술대상과 2007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최종후보에 오른 바 있다.
References
- BB&M, 배영환 (BB&M, Bae Young-whan)
- PKM 갤러리, 배영환 (PKM Gallery, Bae Young-whan)
- 세계일보, 현대인 자화상·인간의 욕망 ‘형상화’, 2012.03.06
- 국립현대미술관, 배영환 | 유행가-크레이지 러브 | 200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Bae Young-whan | Pop Song – Crazy Love | 2006)
- 경기도미술관, 배영환 – 아주 럭셔리하고 궁상맞은 불면증 (Gyeonggi Museum of Modern Art, Bae Young-whan - Luxurious Miserable Insomnia)
- 아트선재센터, 플랫폼 서울 2009: 배영환 도서관 프로젝트 “투머로우(來日[Tomorrow])” (Art Sonje Center, Platform Seoul 2009: Bae Young-whan – Library Project “來日(Tomorrow)”)
- BB&M, So Near So F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