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두(b. 1969)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흥미로운 퍼포먼스와 연출 중심의 사진과 영상, 설치 작업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조명을 받아왔다. 그는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의 작가로 선정되는 등 국내외 미술계에서 활발하고 활동하고 있다.


정연두, 〈보라매 댄스홀〉, 2001 ©정연두

정연두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지만 사진 작업으로 이름을 알려왔다. 그가 처음 사진을 매체로 한 작업은 <영웅>(1998)이었다. 어느 날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사고가 난 청년을 도와준 작가는 그가 동네 아파트로 배달을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할리 데이비슨 같은 질주를 꿈꾸는 이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이는 10대 음식점 배달원의 찰나를 액션 영화배우의 포즈처럼 남긴 사진 작품 <영웅>의 탄생 비화가 되었다. 이처럼 정연두는 주로 평범한 사람들의 꿈이나 사연을 사진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비록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꿈일지라도 작가의 사진 속에서 사람들의 꿈은 실현되어 남아 있다.

작가의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인 “보라매 댄스홀”(대안공간 루프, 2001)은 사진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처음으로 보여준 전시였다. 작가는 보라매 공원에서 춤추는 중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벽지 패턴화하여 전시장을 가득 메웠고, 전시공간을 춤추는 댄스홀로 탈바꿈시켰다.

보통의 중년들이 간직해온 낭만은 사진을 넘어서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사진 매체를 선택했지만 사진 작품을 만들려는 태도가 아닌, 그 매체의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해 도려내는 행위를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라 설명했다. 즉, 그에게 사진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정연두, 〈내사랑 지니 #2〉, 2002 ©정연두

정연두는 계속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꿈에 주목했다. 그의 대표작 <내사랑 지니>(2001-)는 사진기를 요술램프로 삼아 사람들의 꿈을 잠시나마 실현시켜주는 작업으로, 작가는 이를 위해 6개국 13명의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가는 그들과 인터뷰한 후 현실의 모습을 찍고 이와 동일한 구도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각자의 꿈을 이룬 또 다른 모습으로 연출한 사진을 찍어 둘을 평행하게 배치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각기 다른 나라 청년들의 초상은 단지 개인의 소망을 보여줄 뿐 아니라 각기 다른 국가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다.

<내사랑 지니> 연작은 1960년대 미국의 TV드라마 “Bewitched”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카메라 기술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당시, 마법사인 드라마 여주인공이 마술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주인공이 마술을 부릴 때면 카메라를 정지시킨 후 배경과 배우들의 의상을 바꾸고 카메라를 멈추기 직전과 똑같은 포즈를 취한 배우가 다시 연기를 이어 나가는 모습을 촬영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정연두는 이와 같은 기법을 청년들의 소망을 시각화하기 위한 장치로 ‘내 사랑 지니’ 연작에 차용했다.


정연두,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2007 ©정연두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에서 작가가 보여준 <로케이션>과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 이후 정연두는 본격적으로 비디오,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시켰다. 그리고 앞선 작품들은 주로 ‘꿈’을 주제로 해왔다면, 2007년 <로케이션> 연작부터는 사람들의 꿈을 넘어 진짜와 가짜가 혼재된 무대 또는 장면을 통해 우리 배경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작가가 만든 무대 그리고 작업 자체를 본격적인 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는 ‘영상’과 영상을 촬영하는 데 쓰인 카메라, 조명, 소품, 장비 등 ‘설치’로 구성된다. 영상은 ‘방안’, ‘빈 도시의 거리’, ‘농촌 풍경’, ‘들판’, ‘숲’, ‘운해(雲海)’등 총 6개의 장면(scene)으로 차례로 연출되는데, 카메라는 편집 없이 70분 분량을 한 컷으로 촬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에서 촬영된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에서는 배경, 가건물, 소품 등이 교체되고 설치되는 모든 과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소파와 벽걸이 PDP가 있는 거실에 입장하여 바로 이 곳에서 제작된 영상을 감상하게 되며, 영상을 다 보고 나오는 순간 영화 촬영 장비와 소품들이 진열된 전시장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작가가 만든 영상과 설치가 뒤섞인 이 무대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작가는 38세의 나이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연소 작가가 되었고, 이 작품은 이듬해인 2008년 뉴욕현대미술관(이하 모마)의 소장품으로 들어가 큰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정연두, 〈Blind Perspective〉, 2014 ©정연두

2014년 이후에는 전쟁, 재난, 이주, 국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시적 내러티브를 개인 서사 및 신화와 설화 등을 통해 재구성하고, 시와 음악, 연극의 언어를 경유하면서 다큐멘터리적 서사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은 공백들과 다층적인 목소리에 주목했다.

2014년 일본 아트타워 미토(Art Tower Mito)에서의 개인전에서 선보인 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관람객들은 VR 기기를 착용한 채로 작가가 직접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약 16톤의 폐기물들이 늘어져 있는 복도를 걷게 된다.

VR 기기 밖의 모습은 당시 재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잔해들의 모습이지만 기기 안의 모습은 지진이 일어나기 전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 작품 안에서 관람객은 현재와 과거, 가상과 현실 사이의 중첩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정연두, 〈백년 여행기〉, 2023 ©정연두

지난해 “MMCA 현대차 시리즈: 정연두‒백년 여행기” 전시에서는 20세기 초 멕시코로 건너간 한인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백년 여행기>는 멕시코 한인 이민사와 관련된 실제 인물들의 기록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가 직접 연출한 판소리, 일본의 기다유 분라쿠, 그리고 멕시코 마리아치의 공연을 영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공연을 기록한 영상 3개와 함께 작가가 멕시코에서 촬영한 농부, 노동, 군중, 식물 이미지를 담은 영상이 리드미컬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이 작업을 위해 멕시코에 세 차례 방문하여 한인 이민 후손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민자들과 소통해왔다. 이러한 작가의 관계 맺기를 통한 작업 방식은 멕시코 이주 서사 내부의 미시적인 부분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텍스트, 퍼포먼스, 영상, 사운드, 무대적 설치 등이 혼합된 복합 매체 작업은 이주의 역사 아래 숨겨진 다양한 역설과 모순의 상황 및 혼종성의 맥락을 떠오르게 하는 시각적 장치로 작동한다.

“어떻게든 최대한 주관적이고 미시적이지만 거시적인 이야기를 관객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품은 어떻든 최대한 주관적이고 미시적이죠. 하지만 관람객과 만나면 거시적인 관점을 갖게 돼요. 그러니 관람객이 예술 작품에 공감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거죠. 작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정연두 작가 ©국제갤러리

정연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마틴 칼리지에서 조소과를 수료했다. 런던대학교 골드 스미스 칼리지에서 미술석사를 받았다. 2001년 첫 개인전 이래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광주 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이스탄불 비엔날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인 바 있으며 한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2008년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를 소장한 것을 비롯해 국립현대미술관, 시애틀 미술관, 도쿄도 현대미술관 등에 그의 주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