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b. 1964)은 지난 20여년 간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구성하는 텍스트로부터 시작하여, 조각, 설치, 영상,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 정치, 문화적 현상들을 번역하거나 차용하여 재배열하는 작업을 한다.
김홍석의 작업은 동시대의 미술을 미술로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와 미술계를 중심으로 그물망처럼 얽힌 여러 시스템들을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관념이나 선입견을 뒤집으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김홍석, 〈쿵(Thump!)〉, 1999 ©김홍석
김홍석은 1998년부터 2011년까지 글쓰기, 퍼포먼스, 회화, 비디오라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번역, 차용, 재해석, 차이에 대해 언급하는 ‘다름의 닮음’ 연작을 선보였다. 서구의 현대미술 컨텍스트와 이에 대한 시각성은 차이에 의한 차이로 인해 경계선을 명확하게 하지만 ‘다름의 닮음’은 차이에 내포된 원본성을 비롯해 차이와 차이간 경계 모두를 그대로 차용한다.
가령, 텍스트 작업인 〈쿵(Thump!)〉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는 연속적인 번역의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은 번역이 거듭될수록 제목이 바뀌거나 이야기가 왜곡되며 저자는 모호해지는 등 원본과 점점 멀어져간다.
이러한 반복적인 연속 번역으로 생성된 차이는 오히려 작가에게 ‘창작’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로 인해 형성되는 모호한 정체성의 탄생은 김홍석의 작업에서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동화된 다름’이다. 그의 작업은 그저 차이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 보다 더욱 풍요로운 방식으로 다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김홍석, 〈개 같은 형태〉, 2009 ©김홍석
그리고 김홍석은 2008년부터 진행해온 ‘부차적 구성’ 프로젝트를 통해 재료와 형태에 의한 미술의 정치적 태도와 윤리적 정치성을 이야기해왔다. 전통적인 미술 재료로 선택된 돌, 금속, 목재, 캔버스가 내포한 재료의 정치성과 현대 미술가들이 선택하는 일상적 오브제에 나타나는 태도의 정치성에는 모두 경계가 명확한 주체적 대상을 지시한다.
하지만 김홍석은 이러한 주체와 주변이라는 이원적 대치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주변적 재료를 주체화한다. 미술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포장재, 스티로폼, 종이상자, 비닐봉지 등의 여러 부자재들은 김홍석의 입체 작품으로 확장된다.
예를 들어, 김홍석의 〈개 같은 형태〉는 제프 쿤스의 〈강아지〉의 형태를 닮았지만 기존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이 아닌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검정 비닐봉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자재를 미술 작품으로 미술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이러한 작업은 서구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차용하면서 주변부와 중심부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김홍석, 〈토끼입니다〉, 2005 ©김홍석
〈토끼입니다〉는 한국에서 불법 체류 중인 북한 출신의 노동자를 시간당 5달러에 고용하여 하루에 여덟 시간씩 토끼 탈을 쓰고 전시장에 머무르게 한다는 내용의 작업이다. 그러나 토끼 탈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실상은 그저 인형이었다. “탈북한 불법체류자”라는 설정이 사실적이라 관객들은 이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작가의 속임수는 사회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동티모르 이주노동자의 인터뷰 작업인 〈토크〉(2004) 또한 사실 배우의 연기에 불과했다. 작가는 우리 사회 속 소수자를 주제로 한 그럴듯한 허구로써 관객을 속이며 관객이 가짜임을 알아차리는 것까지 유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홍석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묻는다.
2011년부터 시작된 김홍석의 ‘사람 객관적(People Objective)’ 프로젝트는 김홍석이 미술가로서, 소속된 사회의 한 개인으로서 자신과 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가깝게 관계된 ‘사람들’을 자신의 작품에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이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의 초대(또는 고용)에 응한 ‘사람들’은 배우, 도슨트, 비평가,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퍼포먼스 작업인 〈사람 객관적-좋은 비평 나쁜 비평 이상한 비평〉은 세 명의 평론가를 고용하여 작품 평을 의뢰하여 강연과 토론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세 가지의 평론은 김홍석이 제시한 미술작품과 함께 네 사람에 의한 공동 작품이자 네 개의 독립된 작품으로 완성된다.
작품에 개입되는 타인의 지적 노동과 경제적 보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과정까지도 관객에게 드러내며 예술 이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냉정한 현실의 모습을 다룬다.
김홍석은 입체작품이나 설치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요구되는 수많은 도면이나 드로잉이 작품 제작 이후 결국 보조적 역할에 그치게 되는 것에 주목한다. 작가는 완성될 주체를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던 도면을 작품 제작의 주체로 끌어와 작품을 완성하는 ‘완전한 미완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령, 작가는 종이를 불규칙하게 구긴 다음 구겨진 상태가 완성된 상태라 가정하고 이를 다른 재료로 재생산하기 위해 도면을 그린다.
작가는 우리가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마음은 인간의 통념이자 사회적 학습에 의한 결과일 것이라 말한다. 〈불완전한 질서 개발(의지)〉은 보통 임시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부자재인 스티로폼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조형 작품이다. 스티로폼 판재는 도면의 치수에 의해 공사과정에서 절단되며, 필요가 사라진 스티로폼 판재들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김홍석이 작품을 위한 재료로 스티로폼을 사용할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불규칙적이고 미완성이며 임의적인 스티로폼 조각을 미술작품으로 제안함으로써 집단적 합의에 의해 정의되는 ‘미술적 형태’나 ‘완전함’을 거부하며 불완전성에 대한 찬미만을 가득 담아낸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리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의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현해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미술가의 책임이다. 결국 미술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술은 무엇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김홍석 작가 ©국제갤러리
김홍석은 서울 출생으로 1987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현재 상명대학교 무대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국내외 주요 기관에서 꾸준히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져왔다.
국립현대미술관,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트선재센터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여왔다. 오쿠노토 트리엔날레(2017), 난징 국제 아트 페스티벌(2016),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14), 광주비엔날레(2012), 리옹비엔날레(2009), 베니스비엔날레(2005, 2003)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에도 참여했다.
작가의 작품은 현재 미국 휴스턴 미술관, 캐나다 국립미술관, 호주 퀸즈랜드 미술관, 프랑스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르 콩소르시움, 일본 구마모토 미술관과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을 비롯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포스코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