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제정된 에르메스 재단의 미술상은 외국계 회사로서는 처음으로 국내 예술가를 후원해 국내 현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올해 수상자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김희천 작가이다.
프랑스의 수많은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에르메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 중 최고로 꼽는 브랜드이다. 199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 품질을 낮추는 기업화 전략을 펼쳤지만 에르메스는 그에 동참하지 않았다.
에르메스는 1837년부터 세대를 거듭하면서 고유의 장인 정신으로 수작업을 통해 제품을 만들어 온 브랜드이다. 이들은 자사에서 제작한 제품을 하나의 예술품이라 여기며 창의성과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이같은 예술에 대한 에르메스의 관심과 후원은 2008년 에르메스 재단이 설립되고 더욱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에르메스 재단은 현재 서울, 브뤼셀, 싱가포르, 도쿄 등 세계 4곳에서 동시대 미술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시각 예술가들이 에르메스 장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입주 작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 기반 작가들을 위한 현대 사진 프로그램과 전 세계의 퍼포먼스 작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에르메스 재단의 ‘미술상’은 한국 현대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어로도 미술상(missulsang)이라고 불리는 이 상은 에르메스 재단이 설립되기도 전인 2000년부터 시상되었으며, 외국계 회사가 시상하는 상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내 예술가를 후원해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그렇다면 왜 에르메스는 한국에 이러한 수상 프로그램을 만들었을까?
1997년 에르메스는 한국에 처음 진출하면서 당시 신세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 미술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술상을 제정했다.
에르메스 재단 현 디렉터 로랑 페쥬(Laurent Pejoux)는 퍼블릭 아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997년 에르메스 재단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할 당시 회장이었던 장-루이 뒤마(Jean-Louis Dumas, 1938~2010)는 한국에 현대 미술상을 제정해 젊은 작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뒤마 회장은 창의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 장인의 숙련된 손으로 만들어진 오브제를 생산하는 발원지로서 현대 창작 예술을 장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 (한국의) 작가들의 비전은 설치 및 비디오 예술 등을 포함하여 획기적이고 현대적인 형식으로 표현되고, 한국의 역사에 깊숙이 박힌 오랜 전통과 중요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에르메스는 국내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 중요한 미술상으로 역할하기 위해 미술상 지원 방식에도 변화를 모색해 왔다.
초기에 매년 후보 3명 중 최종 수상자를 정하던 방식으로 진행되던 미술상 시상은 2015년 이후에는 2년에 한 번씩 후보 없이 1명을 선정해 서울의 전시 공간인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를 개최할 기회를 주고 파리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재단은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해서 더 멀리 뻗어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에르메스 재단이 직접 시상 제도를 운영해 한국 작가에게 프랑스라는 유럽 무대와의 연결 고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예술 후원의 큰 강점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Kim Heecheon.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미술상은 올해도 수상자를 배출했다.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로는 김희천(b. 1989) 작가가 선정되었다.
심사위원단은 심사평에서 “김희천의 작업은 일상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디지털이 지배하는 이 시대의 가장 도전적이고 시급한 질문들, 즉 인간의 육체, 감정, 기억, 상상, 그리고 결국에는 자아 인식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며 “그의 작업은 현실과 가상, 희망과 불확실성, 쾌락과 위험 사이를 무수히 오가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김희천 작가는 아트선재센터(서울, 2019),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샌프란시스코, 2018), 두산아트센터(서울, 2017)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그는 2020 부산비엔날레(부산, 2020), 제13회 카이로비엔날레(카이로, 2019),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19), 제12회 광주비엔날레(광주, 2018), 제15회 이스탄불 비엔날레(튀르키예, 2017), ZKM(카를스루에, 2019), 마닐라 현대미술관(마닐라, 2019) 외 다수의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Installation view: Kim Heecheon, Deep in the Forking Tanks, 2019, single-channel video, HD (16:9), stereo, 43mins.
Commissioned and Produced by Art Sonje Center. Photo by Kim Yeonje.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Art Sonje Center.
김희천 작가는 2000만 원의 상금과 전시를 위한 신작 제작 지원금을 받는다. 수상 기념 개인전은 내년 하반기 서울 강남구의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지하 1층에 위치한 전시 공간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프랑스 파리의 에르메스 재단 및 주요 미술관·갤러리 방문 등 유럽 미술계와 교류할 기회를 제공받는다.
이번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심사위원단은 총 6명으로 구성되었다. 아트선재센터 아티스틱 디렉터 김선정,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아티스틱 디렉터이자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시니어 큐레이터 이숙경, 홍콩의 M+미술관의 부디렉터 정도련, 프랑스 파리의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프레지던트 기욤 데상쥬(Guillaume DÉSANGES), 이태리 로마의 MAXXI 미술관(MAXXI, National Museum of 21st Century Arts) 아티스틱 디렉터 후 한루(Hou HANRU), 에르메스 재단 디렉터 로랑 페주(Laurent PEJOUX)이 심사에 참여했다.
에르메스 재단의 미술상은 2022년까지 총19명의 걸출한 작가를 배출했다. 역대 수상자들인 장영혜(2000), 김범(2001), 박이소(2002), 서도호(2003), 박찬경(2004), 구정아(2005), 임민욱(2006), 김성환(2007), 송상희(2008), 박윤영(2009), 양아치(2010), 김상돈(2011), 구동희(2012), 정은영(2013), 장민승(2014), 정금형(2015), 오민(2017), 전소정(2019), 류성실(2022) 작가는 현재 국내외 전시에서 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