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미술관의 소장품은 당대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수집된 시기에 따라 미술관이 지향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사회의 흐름에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MMCA Cheongju Art Storage Center. Photo by Aproject Company.

근대 이후에 설립된 국립 미술관들은 국가나 지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최초로 설립된 미술관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고, 유신 정권 시절에 건립된 미술관들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오늘날 미술관들은 어떨까? 이들은 이제 한 문화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기보다는 여기서 벗어나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간과되었던 타자의 이야기를 아우르고 역사적으로 억압되었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등 더욱 포괄적이고 다원적인 가치를 담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미술관이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와 가치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특히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소장품은 해당 기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상으로서 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미술관 컬렉션은 당대의 이데올로기 상황에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 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컬렉션 또한 수집된 시기에 따라 미술관이 지향하는 가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사회의 흐름에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해당 글은 연규석의 2022년도 논문 “1971년부터 2020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특성 및 작가 국적 변화와 현황에 따른 세계화 연구”에 나오는 시기별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의 발전 과정을 참고하였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MMCA Cheongju Art Storage Center. Photo by Aproject Company.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경복궁에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소장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미술관이 1973년 덕수궁으로 이전한 뒤부터였다. 이 시기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수집 정책은 ‘상설 전시 작품의 확보’와 ‘문화유산으로서 현대 미술의 재인식’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수집된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를 구축하기 위한 작품들이었다.  이 시기 한국 미술계는 한국 전쟁 이후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며 표현 양식에 대해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으며, 동시에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 미술에 대한 인식을 넓혀 나갔다.

그 전까지 앵포르멜로 대변되었던 한국 현대 미술계에 단색화가 등장했다. 1975년 도쿄 갤러리에서 열렸던 “한국: 다섯 명의 작가, 다섯 개의 백색”전을 계기로 ‘백색 모노크롬’이 언급되면서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 미술의 정체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식 포토리얼리즘과 함께 신형상 미술 운동이 전개되었다.

초창기 국립현대미술관은 연평균 약 4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기간에 수집한 작품의 수는 396점에 불과했다. 해당 기간에 소장된 작품은 동양화, 서양화로 대변되는 한국 근대 미술과 추상 회화, 앵포르멜, 단색화와 같은 모더니즘 회화였다. 또한 미술관에서 수집한 해외 작가의 작품은 2점뿐이었다.

당시 작품이 소장된 작가들로는 고희동, 곽인식, 김은호, 김환기, 남관, 노수현, 박서보, 박수근, 서세옥, 유영국, 이성자, 장두건, 허건, 허백련 등이 있었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Exhibition view of “To the World Through Art Highlights of MMCA Global Art Collection from the 1980s–1990s,”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Courtesy of the museum.

1980년대는 국내외 미술계에 많은 변화가 일었던 시기였다. 1970년대 포스트모던 문화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국제 미술계는 여성, 동성애, 이민자, 장애인, 약물 중독자, 포르노그래피와 같이 외면되거나 차별받고, 금기시되었던 이슈들을 다루었다. 미국에서는 사진사실주의 경향과 함께 낙서로만 여겨졌던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유럽에서는 신야수파와 자유 구상 회화 양식이 떠오르면서 이러한 작품들이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소장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한국은 빠른 경제 발전을 통해 중산층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한국의 문화 예술계도 크게 확대되었다. 무엇보다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대규모 국제적 행사가 개최되면서 한국은 이 시기에 맞춰 모든 분야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맘때쯤 국립현대미술관도 1981년 문화공보부의 방침에 따라 이경성 미술 전문가가 관장으로 취임하는 중요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는 미술관 관장직을 맡은 첫 전문 미술인이었다. 나아가 1986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개관되면서 미술관은 조직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미술관 소장품 수집을 위한 예산이 증대되었다. 1986년 이전까지만 해도 평균 1억 원을 웃돌았던 예산이 10배로 증액되었다. 1980년대 소장품은 작가 수 기준 총 2,819점으로 1970년대에 비해 무려 7배나 증가하였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6년 작품 심의 제도를 도입해 소장품 수집에 대한 전문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국전 수상작들이 소장품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많은 기증도 이뤄졌다. 특히 이 시기 대표성을 띠는 소장품들은 1988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여 열린 “국제현대회화전”에 출품된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 87점이 기증된 결과이다.

Exhibition view of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the 1960s-1970s,”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Courtesy of the museum.

관장직을 역임할 당시 이경성은 예술성 높은 청년 작가의 작품 수집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은 1970년대와 유사한 유형의 근대 미술 작가의 작품을 수집했으며, 사실주의 계열의 젊은 작가들과 이우환, 백남준 등 글로벌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또한 과거에 비해 방혜자, 천경자, 최욱경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발하게 제작된 민중 미술 계열의 작품은 수집하지 않았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축에 많은 발전이 일어났지만 민중 미술 계열 작품이 배제되었다는 점을 통해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한쪽으로 치우쳐진 수집 정책으로 다양성을 반영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미술관의 컬렉션은 좀 더 전문적인 체계를 갖추며 양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팽창했다.  이 당시 미술관은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인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함으로써 국제적 흐름을 반영하고자 했으며, 더욱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문화 예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들도 크게 증가했지만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84% 이상을 차지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