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집한 소장품들은 시기별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미술관이 추구하는 정체성과 더불어 앞으로 미술관이 써내려 가고자 하는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세계화의 발전 흐름에 따라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시기별로 새로 소장된 작품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미술관에서 써내려 가고자 하는 소장품 역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은 미술관 소장품뿐만 아니라 조직 구성, 프로그램 등 운영 전반에 걸쳐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구겐하임 재단은 미국과 유럽에만 집중되었던 소장품의 범주를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 및 북아메리카로 확대하고 2020년에는 미술관 내 ‘흑인과 원주민, 유색 인종(Black people, Indigenous people and people of color, BIPOC)’들을 포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욕현대미술관은 2019년 10월 재개관하며 소장품 상설전에 그동안 미술관이 소개해 왔던 미술사에서 소외되었던 국가 출신 작가와 여성 및 흑인 작가, 성 소수자 작가 등의 작업을 전면 내세우기도 했다. 다른 많은 미술관들도 이와 같은 소장품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내 대표 미술관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한국 미술계에서 소외된 작가들의 작품을 제대로 포용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현대 미술이 국제 미술 무대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1990년대 국제 사회는 공산 국가들이 붕괴하면서 냉전 시대가 종식되었다. 그 영향으로 중국 현대 미술 작가들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서구권 국가로 이동하면서 국제 미술 무대에 이들의 작업이 등장했다. 이때는 무엇보다도 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통해 미디어 아트와 같이 기술을 요하는 예술과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했다. 이로써 미술계의 판도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한국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한국 미술계는 국제화되고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국내 미술 시장이 지나치게 과열되면서 정부는 과소비 투기 대상 근절책을 내세워 갤러리에 대한 세무 조사를 시행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미술 시장은 크게 위축되면서 국내 갤러리들은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내에 아트 페어와 경매 시장이 등장하면서 고객층도 다변화되었다.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미술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계기로 청년 작가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1989년 한국은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해외 문화를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 규제가 점진적으로 철폐되고 개방 경제 체제에 접어들면서 해외 미술 업체들이 한국에 지점을 열 수 있게 되었다.
1993년에 대전엑스포가 개최됨에 따라 엑스포 연계 전시가 진행되고, 이와 함께 휘트니 비엔날레가 서울에서 열리며 한국 미술계에 글로벌 미술이 소개되었다. 또한 1995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 개관하기도 했다.
이때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외 우수 작품 확보를 통한 ‘미술관의 위상 재정립’과 누구나 즐겨 찾는 ‘문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표방했다. 당시 관장을 지낸 임영방은 작품 수집에 있어 ‘원로 및 작고 작가의 대표작’, ‘국내 주요 공모전의 수상 작품’, ‘세계 미술 조류에 크게 기여한 외국 작가의 주요 작품’이라는 3분화된 소장품 정책을 강조하였다.
1990년대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 작품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는 작품의 수준을 높이고 국제 미술계 흐름을 컬렉션에 반영하는 것에 좀 더 주안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소장품 수는 총 1,050건으로 1980년대 소장품 수의 38% 수준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시기에 평면, 설치, 입체,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수집했다. 대표적으로 고낙범, 최정화, 전수천, 김구림, 안필연과 같은 당시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수집되었다. 국제 미술 무대의 경험이 있는 코디최, 여성주의 작가로 알려진 윤석남의 작품도 수집되었다. 또한 1995년 개최된 “민중미술 15년” 전을 계기로 임옥상과 같은 민중 미술 작가들의 작품 또한 이 시기에 수집되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2000년대 국제 미술계에는 다원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은 물론, 인도, 브라질, 중동, 아프리카, 러시아 등 여러 국가 출신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미술 시장이 크게 성장하여 2015년 미술 시장에서 중국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작품 판매 기록을 올렸다. 중국 미술 시장의 성장은 동아시아 미술계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7년 외환 위기와 정권 교체 이후 국내 미술계의 판도도 크게 변화했다. 한국 현대 미술은 세계화의 맥락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 비엔날레, 미술관, 대안 공간 등 미술 제도적 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이후 국내 미술계가 국제화되며 해외 진출 작가도 늘어났다. 이 시기 이불, 서도호, 김수자와 같은 작가들은 해외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홍경택, 전광영, 김동유와 같은 작가들은 국제 아트 페어나 경매를 통해 작품을 판매했다.
1990년대부터 다양성과 개인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 2000년대에는 개인의 일상과 소소한 경험을 드러내는 경향의 작품이 증가했다. 또한 도시, TV, 영화, 패선 등 대중문화 이미지를 다룬 작품들이 늘어났으며, 미술, 무용, 연극, 음악,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원 예술이 발전했다.
200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구매 방향은 ‘한국 근대 미술’, ‘한국 동시대 미술’, ‘해외 현대 미술’ 등 세 방향으로 추진됐다. 또한 소장품 예산은 1970년대 한 해 평균 1천 8백만 원에서 1980년대 3억 원,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50억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이 시기 소장품의 수는 모두 2,415건으로 조사되어 1990년대에 비해 57% 증가했다.
이 당시 수집된 작품들을 보면 원로·중견 작가들의 작품 수집은 둔화한 대신 1950년대생 작가들의 작품들이 대량 수집되었다. 또한 형상 미술, 사실주의, 민중 미술 경향의 작품 수집 경향이 뚜렷해졌으며, 여성 작가들의 작품과 서도호, 김수자, 김인겸, 이불과 같이 비엔날레에 참여하였거나 국제 미술 무대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소장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 시기에는 평면 회화는 물론, 사진, 비디오, 매체, 설치 등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선보이는 1960-1970년대 출생 작가들의 작품이 주로 수집되었다.
해외 작품으로는 추상 회화, 미니멀리즘, 개념 미술, 여성주의, 자유 구상, 표현주의, 신구상주의, 사진 미술 등 서양 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보여 주는 수준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수집되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2005년 유네스코 정기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협약(문화다양성 협약)”이 채택된 후 전 세계의 많은 미술관에서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려는 시도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술관들은 관내 인종과 지역, 성별, 종교적 격차를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세계화 현상도 지속되어 아프리카, 동유럽, 아시아, 남미 등 세계 여러 국가 출신 작가들이 국제 미술 무대에 소개되고 있다.
김두이와 박혜성의 논문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및 소장의 다양성: 2011년부터 2020년까지의 작가 및 매체의 다양성을 중심으로”(2022)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2010년에 문화다양성 협약을 비준했다.
하지만 한국은 다양한 문화의 공존에 대한 필요성보다는 한국 문화를 소수 문화로 보고 이를 보호하며 자문화를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러한 경향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에서도 드러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0년부터 서울관 개관을 대비하여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13년 서울관 개관을 계기로 2015년까지 10,000점의 소장품 수집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한국 현대 미술의 학술적 연구 활성화’, ‘세계적 수준의 작품 보존 체제 구축’, ‘소장 작품의 대내외 활용 강화’와 같은 미술관 소장품 운영에 대한 중장기적 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순차적으로 일본, 중국, 인도, 싱가포르,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같은 아시아 국가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새로 구입한 작품 중 90% 이상이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다. 2017년 해외 작가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긴 했으나 해외 국가 출신 작가의 작품은 최대 2%를 넘지 않았다.
즉, 발표와는 달리 미술관 소장품에 다양성이 반영되고 있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별의 편도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 작가의 비중이 크게 증가 하긴 했으나 여전히 이 기간에 소장된 작품들 중 남성 작가가 전체의 74.2%를 차지했다. 고연령 작가군 중 성 작가의 비중을 1920년부터 1934년 출생 작가의 경우 여 작가가 10배, 1919년 이전 출생 작가의 경우 35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사회의 흐름을 반영해 왔지만 최근 동시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화두인 ‘다양성’을 소장품에 반영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상이한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도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 미술계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여성 작가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 작가의 소장품 비율을 맞추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 근로자, 결혼 이주민, 조선족·고려인, 북한 이탈 주민, 귀화 주민, 유학생 등이 증가하고 있는 만큼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한국 미술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소장품에 반영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장품도 한국 사회의 맥락에 맞게 문화 다양성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References
-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
- 연규석, 2022, “1971년부터 2020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특성 및 작가 국적 변화와 현황에 따른 세계화 연구,” 예술경영연구, 61, 41-77.(Yeon Gyu-seok, A Study of Globalization, Characteristics and Nationality in MMCA Collection from 1971 to 2020)
- 김두이와 박혜성, 2022,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및 소장의 다양성: 2011년부터 2020년까지의 작가 및 매체의 다양성을 중심으로,” 문화정책논총 제36집 2호. (Kim Dooiee and Park Hyesung, Diversity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Artist and Media Diversity in the Exhibitions and the Collections)
- 임근준, 2021, “미술관 소장선을(이) 형성하는 비평적 역사관: 미술사의 헤게모니를 직조 및 추동하는 소장선을 구축하고 업데이트하기” 세마 코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