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b. 1964)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대에 편승하지 않는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오며 한국 현대 설치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철사, 투명 비닐, 에어 튜브, 플라스틱 거울, 유화로 칠한 시트지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공간을 재해석하는 대형 설치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기원은 1990년 13회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이래 줄곧 단순하고 즉물적인 작업을 선보였으며, 90년대 중반부터 공간과 재료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미술작품의 존재 방식은 물론 관람자에게 새로운 감상 방식을 제안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주목받았다.


박기원, 〈움직임〉, 1996 ©200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박기원의 초기 작업은 회화의 물질성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합판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물질의 고유한 특성을 살린 미니멀리즘적 평면 실험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1996년부터는 이러한 순수한 물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공간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작가의 공간 설치 작업은 우선 그 장소에 대한 사적인 느낌으로부터 시작한다. 1996년 가인화랑에서 선보인 〈움직임〉의 경우에는 공간의 빈 벽에서 아무것도 없지만 길고 넓은 표면적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움직임을 감지했던 것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전시장의 벽에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한 결과 작가는 얇고 반투명한 1m의 옥색 FRP(폴리에스터 수지에 섬유 등의 강화제로 혼합한 플라스틱) 보드를 벽에 나열하여 붙임으로써 공간이 갖는 순수한 성격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박기원, 〈감소〉, 2005 ©313 Art Project

반투명 옥색 보드는 이후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출품한 〈감소〉에도 등장했다. 박기원은 베니스의 주변 풍경을 배경으로 옥색 보드를 두른 한국관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연출하였다. 옥색 보드는 건물 외벽을 감싸면서 내부로 이어지는 관람 동선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그 위에 다른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처럼 〈감소〉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특성을 살리면서 전시 전체를 연결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흥미로운 단면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박기원, 〈가벼운 무게〉, 2006 ©313 Art Project

그리고 다음 해 박기원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에서의 개인전에서 공간의 물질성에 주목한 설치 작업 〈가벼운 무게〉를 선보였다. 작가는 미술관 건물의 두꺼운 벽면과 돌 바닥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에 주목하였고 그 안에서 가벼움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다. 그 결과 가볍고 투명한 젤을 벽에 도포하고 같은 색의 말랑한 소재의 튜브를 바닥에 깔아 관객이 바닥에 눕고 쉴 수 있는 편안하고 가벼운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박기원, 〈배경〉, 2010 ©313 Art Project

국립현대미술관 ‘2010 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박기원은 그의 개인전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에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공간을 소재로 한 〈배경〉, 〈희미한〉, 〈에어월〉 3점을 선보였다. 그 중 〈배경〉은 과천관의 2,000m2에 달하는 중앙홀 공간을 세밀히 관찰하고, 측정하면서 공간의 역사와 그 안의 특유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서 출발되었다.
 
작가는 공간 특유의 구조와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되 미술관 내벽 마감재인 화강암의 재질을 마치 청록색 옥돌처럼 변화시키기 위해 유화 물감을 칠한 시트지를 한장씩 공간에 부착했다. 이처럼 박기원의 공간 작업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현실과 비현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익숙하지만 낯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작품과 작품이 놓인 공간, 그리고 공간 속에 포함된 관객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박기원, 〈대화〉, 2022 ©서울식물원

전시가 열리는 장소와 그 장소성 자체를 소재로 삼는 박기원의 최근 작업으로는 〈대화〉(2022)가 있다. 〈대화〉는 서울식물원의 장소성을 재해석한 작업으로, 식물원을 찾는 시민들이 낙엽을 밟으며 산책하는 것에서 착안하여 수북이 쌓여 있는 가상의 낙엽을 밟으며 전시장 안을 걷도록 유도한다. 동, 신주 등의 소재로 구성된 작품 위를 걸으며 자신의 움직임을 느끼고 그로인한 소리를 들으며 자신과 무언의 대화를 하도록 제안하다.
 
박기원은 자신의 작품을 “텅 빈 공간과의 대화”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공간이 가지는 역사,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작업을 전개해오며 ‘공간과 함께 호흡하는 작품’을 지향해왔다. 그리고 그 안에 관객들이 들어와 공간과 상호 작용을 할 때 그의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나는 공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품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보다 공간 속의 작품, 즉 공간과 작품이 중립적이기를 원한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환경이나 풍경은 그대로 있고, 그 위에 ‘미세한 공기의 흐름’, 팔의 솜털이 움직이듯 한 미세한 바람처럼 어떤 자극도 없어 보이며, 방금 지나친 한 행인의 기억할 수 없는 모습과 같은 최소한의 ‘움직임’을 원한다.” (박기원 작가노트)

박기원 작가 ©노블레스

박기원은 충북대 미술교육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박기원은 313 아트프로젝트 (2019, 2016),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0), 마드리드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 (2006), 아르코미술관 (2006)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룹전으로는 수원시립미술관 아트 스페이스 광교 (2020), 청주시립미술관 (2019), OCI 미술관 (2018),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6), 아모레퍼시픽미술관 (2016), 서울 금호미술관 (2015), 서울 Esprit Dior, DDP (2015), 프랑스 물랭 Galleria Continua (2014-15), 베를린 East Side Gallery (2014), 부산시립미술관 (2013) 전시에 참여했다. 2005년에는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의 참여 작가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00년에는 광주 비엔날레 특별 전시에 참여하였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