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이소(1957-2004)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로 활동하며 한국 미술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199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개념적 태도와 특징을 작품으로 풀어내며 국내 미술계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형성에 크게 기여를 한 인물이었던 박이소는 2004년 심장마비로 인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1982년과 귀국한 연도인 1995년을 기준으로 그의 작품 활동을 구분할 수 있다. 뉴욕 유학 시기에는 ‘박모(Mo Bahc)’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한국인 이민자로서 미국의 다문화사회 안에서 정체성 문제를 다뤄왔다.

이때 그는 작업 활동만 아니라 브루클린 지역에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해 뉴욕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민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리더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박이소’로 활동하며 사회와 현실에 대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개념미술을 작업하는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시각을 담아낸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Bahc Yiso, Mo Bahc's Fast After Thanksgiving Day, 1984 ©MMCA

박이소는 뉴욕에서 생활하며 주변부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작업하며 탈식민주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박이소는 당시 이러한 주제를 회화 작품으로 다루기도 했으며 퍼포먼스를 통해 직접 몸소 풀어 나가기도 했다. 1984년 추수감사절에 어느 미국인 가정이 주최하는 만찬 자리에 초대받은 박이소는 그날 이후 사흘간 밥을 굶고 밥솥을 목줄로 자신의 목에 매단 채로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그의 동료인 작가 강익중이 곁에서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작가의 이러한 기행은 서구 미술계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묵묵하게 지켜 나가는 작가의 의지를 담은 제스처이자 일종의 정치적 미술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Bahc Yiso, Weed, 1988 ©MMCA

박이소는 미국 사회 내에서 소수민족으로서 한국인 이민자로 범주화되고 규정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수없이 고민했다. 그는 당시 미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것이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고 자긍심을 주는 한편 ‘한국적’으로 타자화되고 정형화되어 버리는 딜레마를 발견했다.

박이소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그냥 풀’을 그렸다. 문인화의 소재인 난초를 대충 그리며 ‘풀’, ‘그냥 풀’, ‘잡초도 자란다’ 등의 텍스트를 옆에 적고 붉은 도장까지 찍었다. 문인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엉성하게 보이겠지만 한글을 모르는 이가 보았을 때 그것은 전형적인 ‘한국적’인 그림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고 나면 ‘그냥 풀’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이라는 걸 깨닫게 만든다. 이처럼 박이소는 ‘전통적’인 것이 어떻게 서구인의 눈에 이국적인 것으로 비치며 타자화 되는지를 전통적 소재를 차용한 엉성한 풀 그림을 통해 들추어낸다.

Bahc Yiso, Your Bright Future, 2002 ©MMCA

작가는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오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인 1994년 〈호모 아이덴트로푸스〉를 끝으로 그의 정체성 작업을 마무리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박이소는 회화에서 입체와 설치작업 중심으로 작품세계가 점차 전환된다. 이 시기의 박이소는 혼란스럽고 절망스럽지만 환상적인 세계가 갖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성찰적인 태도로 바라보며 작업을 해왔다.

그의 대표작인 〈당신의 밝은 미래〉(2002)는 여러 개의 밝은 스탠딩 램프가 벽의 한쪽 구석을 비추는 설치 작품이다. ‘밝은 미래’라는 희망찬 제목에 비해 각목으로 세워진 스탠드 램프가 구석을 비출 뿐인 특별할 것 없는 구성이다. 이는 부질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상태를 표상한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구석처럼 사소한 것들을 연약하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추며 희망을 담아내는 이러한 태도는 박이소의 후기 작품들을 관통한다.

Bahc Yiso, Venice Biennale, 2003 ©MMCA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 박이소는 가냘프고 허술해 보이는 각목 구조물을 한국관 앞마당에 설치했다. 〈베니스 비엔날레〉(2003)는 직사각형의 뼈대를 구성하는 네 개의 각목이 네 개의 각기 다른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세워진 구조로 된 설치작업이다.

상단 모서리에 사선으로 걸친 각목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 공원에 있는 26개의 국제관과 세 개의 아스널 건물이 일렬로 나란히 약 3센티미터 크기로 조그맣게 조각되어 있다.

작가는 욕망 표출의 창구이자 문화 패권주의의 표상인 비엔날레 국가관을 축소시키고 단순화시켜 비엔날레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풍자한다. 크기와 재료, 재현 방법 모두 탈권위적이고 탈기념비적인 이 작품은 오히려 순진하고 귀여운 풍경으로 탈바꿈하여 작가가 말하듯 “경쟁 없이 더불어 사이좋게 사는 미래 세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Bahc Yiso, We Are Happy, 2004 ©MMCA

소박하고 담백한 박이소의 예술은 꾸밈 없이 솔직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세속적인 가치를 떠나 소박하게 살고자 한 박이소의 진정성은 그의 여럿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예를 들어, 빌리 조엘의 팝송 ‘Honesty’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작가가 직접 불러 녹음한 〈정직성〉은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와 어울리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2004년 부산비엔날레에 초청받아 작품을 준비하던 어느 날 박이소는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렇게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우리는 행복해요〉(2004)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북한 평양의 건물에 있는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체제 선전용 글씨를 보고 느낀 아이러니한 감정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 작업이다.

북한의 프로파간다 만큼이나 성공과 출세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며 ‘정말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단순하게 ‘우리는 행복해요’가 써진 초대형 간판을 어느 건물 옥상이나 광장 앞에 세우고자 했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스케치로 남게 되었지만, 이후 동료 작가들에 의해 2004 부산비엔날레 전시관 주차장에 실제 간판 형태로 설치되었다.

박이소는 우리 사회의 틈새, 권력 바깥에 있는 주변부들, 사소하고 연약한 존재들을 담담하고 진솔한 태도로 바라보며 예술로써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온 작가였다. 한국으로 귀국한지 고작 10년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미술세계는 이후 세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한국현대미술을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 그림들이, 내 작업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벽에 걸리고 미술관 건물 안에 놓인 저 작업들은 어떤 변화들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것은 꼭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가? 그 ‘변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또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가? 나는 그저 나의 실없는 농담이 좋다. 이 농담을 던지는 순간만큼은 세상이 살아 꿈틀거리고, 내 머릿속도 덩달아 휙휙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박이소 작가노트, 2004)


Artist Bahc Yiso ©The Kyunghyang Shinmun

박이소는 1985년 뉴욕에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하고 1989년까지 관장으로 활동했다. 1995년 귀국 후 새로 설립된 SADI(삼성디자인교육원)의 교수직을 맡았다. 광주비엔날레(1997),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01)을 포함한 국내외 주요 미술전시에 참여하였고 2002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다. 그의 사후, 로댕 갤러리(2006), 아트선재센터(2011, 2014),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2018)에서 그의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