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다원주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 윤동천(b. 1957)은 “예술의 일상화, 일상의 예술화”를 기치로 한 일관된 작품세계를 전개해왔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일상’은 한국 근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시대정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서구의 미술을 받아들인 한국의 현대미술이 갖는 고유한 특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으며,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 사이의 위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대안적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찾아 가는 방법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윤동천은 예술의 ‘사회성’과 ‘일상성’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대상을 향해 재치있고 신랄하게 풍자한다. 개념미술을 기반으로 한 설치와 회화, 판화,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윤동천의 작업은 자유롭게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재해석하고, 새로운 개념으로 전개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전환시킨다


윤동천, 〈거대한 불구-논리〉, 1992 ©윤동천

1980년대 윤동천은 당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반발하는 민주화 학생운동의 충돌을 겪으며,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반응을 판화로써 표현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작가는 다양한 매체를 접하게 됨으로써 설치 개념을 판화에 도입하는 등 판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여러 실험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은 귀국 후 일상의 오브제를 활용한 ‘생각을 유발시키는 작업’으로 발전되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작가가 마주한 당시 한국 사회는 흑백논리에 대한 이야기와 이념 싸움으로 가득했다. 윤동천은 이러한 상황을 ‘불구’와 같다고 생각하며 〈거대한 불구〉 시리즈를 작업했다. 흑과 백으로 반반씩 칠한 5m 크기의 거대 나무 목발을 설치한 작업인 〈거대한 불구-논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윤동천, 〈통계2-1(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재임기간)〉, 2005 ©국립현대미술관

윤동천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며 이처럼 한국의 정치, 사회, 예술 등의 현실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일상적인 오브제로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리고 2005년에는 통계와 수치, 앙케이트 조사, 언어용법 등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중 〈통계2-1(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재임기간)〉은 역대 한국의 대통령 재임기간이라는 수치를 탁구공과 드로잉으로 시각화한 작업이다. 겉으로 보았을 땐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지만, 누가 권력을 독점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윤동천, 〈거대한 침-김수영 시인을 기리며〉, 2011.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윤동천의 회화 작품들은 추상 혹은 미니멀리즘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작가는 현실 속 특수한 문맥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나 사건, 기억을 담는 작업이다. 가령, 〈거대한 침-김수영 시인을 기리며〉는 얼핏 말레비치나 라인하르트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고, 자유로운 형태의 어두운 색면이 숭고미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색장회화(Color Field)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의 부제인 “김수영 시인을 기리며”에서 예상되다시피, 이는 초현실주의적 시를 써오다 1960년대 4.19를 경험하고 억압된 현실과 소시민적 비애를 성찰하는 시로 전향한 김수영 시인을 모티프로 제작된 작품이다.

시인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며 더욱 적극적인 실험을 통해 자유를 추구했던 김수영 시인의 태도처럼, 윤동천의 추상은 화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거나 인류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신의 기치를 내거는 아방가르드적 상징도 아닌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구체적 추상’이다.


윤동천, 〈희망 알약 3종 세트(연애, 결혼, 취업)〉, 2014. ©신세계갤러리 

2014년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윤동천 작가의 개인전 “병치 – 그늘”에서는 오늘날 사회의 그늘을 병치를 통해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였다. 가령, 작가는 삼포세대(三抛世代)라 불리는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불안과 절망이라는 그늘에 주목했다. 윤동천은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어진 오늘날의 청년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게 된 이 현상에 대한 현실공감과 기성세대로서의 반성의 뜻을 전시에 담았다.

젊은 세대에 대한 공감과 함께 희망을 전해주고자 하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희망 알약 3종 세트(연애, 결혼, 취업)〉는 연애, 결혼, 취업이라 써 있는 병 안에 젤리를 넣어 관객에서 헐값에 판매하는 관객 참여형 오브제 설치 작업이다.

윤동천은 사회의 그늘을 드러내는 작업들로 시작해서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 알약 작품을 둠으로써, 비록 우리 사회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지만 결국에는 희망이라는 빛을 찾아낼 수 있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전시에 담아냈다.

윤동천 개인전 “일상_의”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17) ©금호미술관

2017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최된 윤동천의 개인전 “일상_의”에서는 그의 작업의 기본 전제이자 출발점이었던 ‘일상’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장면이나 9.10 촛불시위 등 다양한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진 예술보다 더 예술 같은 사건들을 다룬 〈위대한 퍼포먼스〉(2017) 시리즈부터 아름다움을 생산해내는 대표적인 일상 공간들과 작가의 작업실을 병치한 〈산실〉(2017) 시리즈까지, 윤동천은 예술에서 간과되어 온 일상의 오브제 및 사건들을 미술관 공간으로 끌어와 새로운 감각을 창출했다.

또는 길에서 마주한 껌자국이나 테이프와 같은 일상의 사소한 사물들을 그리는 〈길에서〉(2016)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는 감상의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그 형태를 종이 위에 땄을 때 그 자체가 현대회화처럼 되는 것들을 수록한 시리즈로, 특별함 없는 일상의 무언가를 예술로 가져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일상을 목격하도록 한다.


윤동천 개인전 “추상에 관하여” 전시 전경(갤러리밈, 2023) ©갤러리밈

2023년 윤동천 작가의 개인전 “추상에 관하여”에서는 작가 자신의 삶에 놓인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물건이나 장소의 감각적 단면들에 대한 추상 회화들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설레면서 두려웠던 ‘빨간책’의 경험을 기술하면서 붉은색 사각형을 화면 안에 비스듬히 얹어놓고, 대입 낙방 후 자취를 하며 마신 소주를 떠올리며 연하늘색 원을 화면 가운데에 올려놓는다.

이들은 추상적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환유들로, 작가는 이로써 미술은 그렇게 어렵게, 간헐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편재해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윤동천 작가는 우리의 일상의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낸다. 누구에게든 어렵지 않게 다가가는 그의 예술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열려 있는 소통의 창구로서 존재한다.

“예술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기가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MMCA 작가와의 대화 – 윤동천 작가, 2021.09.18)

윤동천 작가 ©조선일보

윤동천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회화, 설치, 판화, 사진, 드로잉 등으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30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2년에는 국제 아시아 유럽 비엔날레에서 금상을 수상하였다.

영국 대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93년 이후 2022년까지 30년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윤동천은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후학양성을 통해 이어 나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