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라(b. 1974)는 평면작업, 퍼포먼스,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예술과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와 그 안에 살아가는 현 인류의 모습을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너리스한 시각으로 드러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영화감독, 성우, 가수, 연기자, 시인 등)과 협업하며 다층적인 담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김기라는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개인의 사회적, 문화적 위치와 그에 반하는 개인과 집단의 어떤 욕망에 관심을 갖고 있다.

김기라, 〈정물과 일달러〉, 2008 ©대안공간 루프

김기라는 작업 초기부터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해왔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욕망과 소비주의의 단면을 정물화의 형식으로 드러낸 〈정물과 일달러〉(2008)에서는 맥도날드나 버거킹 등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브랜드 로고와 그 상품들이 조합되어 나타난다.

김기라, 〈죽음 코카〉, 2008 ©대안공간 루프

김기라는 오늘날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욕망이나 가치 또한 하나의 소비대상이 됨으로써 상품 자체에 얽힌 소비사회의 환상성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기업의 브랜드들은 상품 자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와 함께 소비행위를 통해 정서적인 충족감까지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의 이미지를 판매한다. 그리고 브랜드의 로고 이미지는 하나의 지시대상인 동시에 소비자의 욕망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된다.

“Super Mega Factory” 전시 전경(국제갤러리, 2009) ©국제갤러리

김기라는 이러한 로고 이미지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아이콘 등을 작품 속 시각 요소로 패러디하여 소비주의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상품의 물신화 현상과 이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이와 같은 차용과 패러디는 그의 작업에 전략적인 방법으로써 종종 나타난다.
 
예컨대 2009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Super Mega Factory”에서 작가는 미술사, 역사, 정치 등에서 비롯된 다양한 참조물들을 끌어들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김기라는 이들을 기존의 문맥에서 벗어나 재치 있게 전환시킴으로써 결코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바라보도록 했다. 괴물과 같이 변형된 영웅 슈퍼맨, 눈에 피멍이 든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 등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반전된 이미지를 통해,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김기라, 〈이념의 무게_북으로 보내는 편지_수취인 불명_황해〉, 2013 ©김기라

그리고 김기라는 한국 사회의 주요한 모순 중 하나인 분단의 문제에 대해 천착해왔다. 예를 들어, 2013년 선보인 영상 작업 〈이념의 무게_북으로 보내는 편지_수취인 불명_황해〉는 남북 관계에 대해 냉면이라는 아주 사소한 소재를 통해 다루고 있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북한에 있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평양냉면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유리병에 넣어 바다로 띄워 보낸다.
 
이 작업은 그의 편지 내용처럼 이념이나 갈등에 대한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대신 김기라는 분단의 문제를 매우 친근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작가는 남북한의 관계에 대해 논의할 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 인간 그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그 시작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기라, 〈떠다니는 마을_정부-소비자-개인_바닥〉, 2015,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15) ©국립현대미술관

김기라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올해의 작가상”전에서는 타 장르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다루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작가는 본 전시에서 ‘플로팅 빌리지(floating village)’라는 단어를 부제로 하여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현대사회 속 부유하는 총체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작품들은 ‘사유’, ‘공유’, ‘향유’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사유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담론화되는 것이고, 공유는 사적인 영역이 예술을 통해 공론의 장으로 확장되어 공공의 차원에서 나누어지는 과정이며, 마지막 향유는 공적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재생산된다는 전제를 제시한다.
 
첫 번째 방에 배치된 〈떠다니는 마을_정부-소비자-개인_바닥〉(2015)은 수많은 갈등이 편재하고 부유하는 장소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서울역에서 시작해 시청과 광화문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까지 카메라를 길바닥에 끌고 다니면서 갈등의 현장들을 녹화한다. 이러한 장소들을 훑어줌으로써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탐구에 대한 도입부 역할을 한다.

김기라,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 2014,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15) ©국립현대미술관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2014)은 신경정신과 의사와 협업해 제작한 영상으로, 1980년대 말 국가보안법에 의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한 화가의 최면치료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 간첩으로 몰려 당국에 끌려갔던 화가는 최면치료를 통해 자신의 몸과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던 잔인하고 부조리한 국가 폭력의 실태를 드러낸다.
 
〈이념의 무게_한낮의 어둠〉에서 작가는 개입하지 않고 치유의 과정을 중개할 뿐이며, 그로 인해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픽션처럼 강력한 현실을 고발한다. 김기라는 이를 통해 공동선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 자행되어 온 사회의 이념이 가진 폭력성을 드러낸다.

김기라, 〈마지막 잎새#02_당신이 나를 원하는 것처럼〉 / 〈붉은 수레바퀴_당신은 나의 것〉, 2015,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15) ©국립현대미술관

김기라는 “늘 이념은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러나 그 이념들이 만든 역사는 늘 폭력적이고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작가는 연기자들과 협업을 통해 이념이 가진 이러한 양가적인 속성을 다룬 영상 작업을 제작해, 이념의 폭력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병치시켜 대조하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선보였다.
 
〈마지막 잎새#02_당신이 나를 원하는 것처럼〉의 물 폭탄 세례를 당하고 있는 남자와 〈붉은 수레바퀴_당신은 나의 것〉의 러프(ruff) 컬러의 옷을 입은 미모의 여인은 각각 이념의 폭력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두 화면을 통해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심미적이고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김기라, 〈플로팅 빌리지_위재량의 노래〉, 2015, “올해의 작가상 2015” 전시 전경(국립현대미술관, 2015)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플로팅 빌리지_위재량의 노래〉(2015)는 저항정신의 하위문화인 힙합 뮤지션들과 협업하여 만든 영상과 음원으로, 한 개인의 삶과 경험, 세상을 향한 비통, 그리고 애정과 인간다움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다.


김기라, 〈플로팅 빌리지_위재량의 노래〉, 2015 ©갤러리 노마드

이 작품은 서울시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재직하며 시인으로 등단한 삼류시인 위재량의 시집을 우연히 접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의 시에서 깊은 공감과 진정성을 느낀 작가는 영화감독, 래퍼들과 함께 이 시에 대한 답가로서 6곡의 음원과 뮤직비디오, 퍼포먼스를 제작하게 되었다. 김기라는 위재량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빌어 불확실한 사회에 대한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김기라, 〈편집증으로서의 비밀 정원〉, 2023,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 전경 ©광주비엔날레

지난해 김기라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다양한 변주를 거듭해온 〈편집증으로서의 비밀 정원〉(2023)을 선보였다. 작가는 도자기, 분재, 감시 카메라, 조각상, 가면, 탱화 등 소위 ‘동양적’ 혹은 ‘한국적’이라 간주되는 사물들을 편집증적으로 수집해 벽면을 가득 채웠다.
 
작가는 특정 집단에게는 그저 평범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 요소들을 집합시킴으로써 맥락에 관계 없이 ‘동양적인 것’으로 쉽고 단순하게 규정짓는 서구중심주의적인 태도를 꼬집는다. 
 
이처럼 김기라는 우리 사회에 내재한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들을 다루는 동시에 그 안에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친근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며 공감을 이끌어내 왔다. 작가는 유동적이고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 허상 뿐인 보편성으로 굳어지지 않은 그 무언가를 찾아내고, 넓은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다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예술을 끊임없이 작업해 오고 있다.

“작가라는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 보다는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작가는 끊임없이 입장과 태도를 통해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고,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향한 사유를 하는 사람이다.”


김기라 작가 ©파주에서

김기라는 가천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영국 골드스미스에서 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작가는 2006년 영국 킹스린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갤러리, 두산아트센터, 대안공간 루프, 보안1942 등 다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제주국제비엔날레, 리버풀비엔날레, 난징 트리엔날레를 비롯한 국내외 세계적인 주요 전시들에 참여해 왔다. 수상 이력으로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2024), ‘해외문화홍보 유공자상’(2019),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9)이 있으며, 2015년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