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b. 1963)은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가의 상상력을 현실의 사물로 유머러스하게 변모시킨다. 그의 작업은 일상의 사물을 새로운 대상으로 변화시킨 오브제(Object) 작업부터 작가의 상상도를 실현시킨 드로잉과 비디오 작업, 단행본 형식의 출판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의 작업이 일상 속 다양한 상황을 풀어내는 방식은 겉으로 볼 때 가볍고 유쾌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인간과 사물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세상의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예리함과 냉철함도 담고 있다. 사회적으로 학습되어 형성된 인식에 균열을 만드는 작가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당신이 보는 것은 보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자기성찰로 유도한다.
김범은 90년대 전후부터 화폭이 지닌 물성과 이미지를 이루는 재료에 관심을 가져오며 회화 평면 너머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 예로, 1994년작 〈무제〉는 캔버스에 지시문을 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캔버스에 적힌 텍스트를 통해 작품을 시각적 대상에서 읽고 생각해야 하는 인식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김범 작품에서의 텍스트 장치는 계속해서 등장하게 되며 간단한 장치에서 대본, 또는 시적 내러티브로 변주된다.
1분 42초 분량의 단채널 비디오 작업 〈무제(뉴스)〉는 매일 같은 시간에 텔레비전 뉴스를 녹화하여 앵커의 말을 잘라 작가가 쓴 대본대로 다시 이어 붙여 편집한 영상이다. 대본의 내용은 현대인의 무력하고 소소한 일상과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으며, 이는 공신력 있는 뉴스 앵커의 모습과 목소리로 전달된다. 이러한 작업은 대중매체가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편집을 통해 미디어의 상징적인 권위를 해체한다.
〈무제(뉴스)〉는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및 제8회 이스탄불 비엔날레를 비롯한 다수의 국내외 주요 전시에 출품된 바 있다.
2002년부터 발표된 청사진과 조감도 연작은 이미지와 기호 그리고 텍스트를 ‘보고 읽는’ 형식의 상상화다. 이 연작은 위아래가 뒤집힌 학교나 폭군을 위한 안전가옥 등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가상 건축물이나 기계 구조를 제시한다.
이는 김범이 오랫동안 의구심을 가져온 인간세계의 단면으로서, 억압과 폭력, 불의와 기만이 지배하는 비관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림 속 인간은 결국 간단한 기호로 환원되어, 거대한 구조 속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담담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진 청사진과 조감도는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가 우리의 현실을 지탱하는 사회 기반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김범은 이러한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을 보다 실질적인 형태로 발전시켜, 2016년에는 ‘폭군을 위한 인테리어 소품’ 프로젝트를 통해 불의한 권력자를 위한 인테리어 및 생활 소품을 제작, 판매하고 수익금을 기부하는 실제적인 순환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2010년, 김범은 교육과정의 맹점과 교육된 현실의 부조리를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며 우리는 어떻게 교육되고 있는지, 그리고 교육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성찰하게 하는 ‘교육된 사물들’ 연작을 발표했다. 그 중 하나인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는 밀폐된 유리 상자 안의 모형 배와 그 배에게 세계 전반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영상으로 구성된다.
영상 속 교육의 내용은 지구의 지질학적, 기상학적, 천문학적 특징들을 다루는 가운데 지구가 육지로만 되어 있다는 거짓된 정보를 담고 있다.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한 세계에서 조립된 배는 통제된 교육을 받으며 좌절되거나 오류가 섞인 지식으로 진실과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김범, 〈”노란 비명” 그리기〉, 2012 ©김범
〈”노란 비명” 그리기〉는 그림을 가르치는 튜토리얼 형식의 영상 작품이다. 노란색 선으로 된 추상화를 그리는 법을 단계적으로 시연하는데, 강사가 제시하는 방법은 사용되는 색과 그리는 선의 움직임에 다양한 비명소리를 담는 것이다. 힘껏 소리를 지르며 추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을 담은 이 영상은 불확실한 관념과 의미에 다가서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노력과 애환을 해학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툭 던져진 농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의미심장함을 품고 있는 김범의 작업은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것, 배워온 것, 상식이라 여겨오던 것 등에 균열을 만들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생각해보도록 유도한다.
“예술에서 가장 매혹적인 요소는 이미지의 진실과 착오다.”
김범 작가 ©STPI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범 작가는 리움미술관(서울, 2023), 쿤스트할 오르후스(오르후스, 덴마크, 2019), STPI(싱가포르, 2017), 헤이워드 갤러리(런던, 2012), REDCAT(로스앤젤레스, 미국, 2011), 아트선재센터(서울, 2010)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또한 제12회 샤르자비엔날레, 제9회 광주비엔날레, 제6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미디어 시티 서울,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제8회 이스탄불 비엔날레, 제1회 타이베이 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작범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홍콩 M+, 클리브랜드 미술관, 휴스턴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