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것을 해체하고 전복하여 새로운 것을 만든다. 미술도 끊임없이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융합하며 변화하고 있는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은 어떨까? 특히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조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은 조각을 전혀 새로운 예술적 결과물로 재탄생시킨 20대에서 40대 사이에 있는 17명의 젊은 작가들을 모았다.
“조각충동”전은 동시대 조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조각을 풀어 나가고 있는지, 작가들의 신선한 감각으로 느끼는 조각에 대한 충동을 살펴볼 수 있다
Back: Kwak Intan, 'childsculptor,' 2022, Resin, PLA, acrylic, water paint, epoxy, urethane foam, steel, aluminum mesh, 374x176x142cm. Buk-Seoul Museum of Art, Seoul. Photo by Aproject Company.
전시장 입구에는 커다란 문의 형태를 한 작품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에서 형태를 빌려온 문이삭 작가의 작품은 지옥, 천국 그리고 연옥을 통하는 문이다. 작품을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시장의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애초의 의도와 목적을 잃은 채 마치 폐기물처럼 도시 구석구석에 방치된 수많은 공공 조형물을 발견할 수 있다. 정지현 작가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조각상 하나를 투과되는 여러 시트의 가벼운 알루미늄 망으로 본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냈다.
강재원 작가의 ‘S_crop’은 마치 미술관 천장을 관통하고 있는 듯한 거대한 쇠 조각의 모습으로 전시장 1, 2층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3D 프로그램으로 구현된 이 작품은 가상 공간에서 손쉽게 변형되고 움직인다. 실제 공간으로 옮겨진 작품은 공기를 주입하는 인플레이터블로 만들어져 바람이 빠지면 납작해지도록 만들었다. 즉, 작품은 가상에서 현실 공간, 3D에서 2D를 오간다.
네 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곽인탄 작가는 조각의 순수성과 근본적 의미를 되돌아본다. 작가는 미술사에 나오는 여러 도상, 현대 사회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 기존 자신의 작품을 참조해 어린아이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탐색하고 표현하듯 작품을 만든다.
오제성 작가는 국내 한 지역에서 발견된 무연고 미지정 미륵불 문화재를 사진으로 촬영하고 3D 스캐너로 조각상을 본뜬 거푸집을 만든다. 그리고 그 거푸집으로 만든 미륵불로 작품을 구성했다. 작가는 전통적 조각 기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반전, 변형, 왜곡 기술을 통해 조각 장르를 실험한다.
홍예준 작가의 작품은 가볍고 기능성 좋은 고어텍스 소재를 3D 펜으로 날카롭게 여러 번 반복 사용하여 제작된다. 작가는 이처럼 경량화된 조각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궤적이나 제작이 지연되는 순간을 관찰한다. 또한, 작가는 이를 디지털 이미지로 기록했을 때 만들어지는 착시 요소를 모아 이를 조각으로 표현한다.
마치 무대와 같은 고요손 작가의 작품은 관객도 조각 작품으로서 참여 가능하다. 이 무대에는 가수, 리더, 연인과 같은 인물 조각상, 그리고 부츠, 정류장, 분수대 등 연극 소품과 같은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다. 고전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우상, 연인의 포즈를 한 조각상에 자연으로 귀의를 설파했던 ‘히피’의 신념을 더해 기성 사회 제도에 도전장을 내밀면서도 사랑에 대한 믿음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우한나 작가는 신체의 장기를 천으로 표현한 패브릭 조각을 만들었다. 이 패브릭 조각들은 가방이나 의류처럼 착용할 수 있다. 작품은 작가가 수술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감각을 구현하고자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수술, 자궁, 아가미 등과 같은 작품을 착용하여 조각의 일부가 됨으로써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최하늘 작가의 두 작품은 하나의 전시 공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재료와 물성을 고민하며 현재 조각 장르가 처한 상황을 표현한다. 작가는 새로운 기술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로 임계점에 다다른 조각 장르의 상황을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비유한다. QR코드를 통해 나타나는 용은 조각이 더 이상 물질로 머무르기를 포기한 상태를 표현한다.
케이팝의 포인트 안무를 형상화한 이동훈 작가의 작품은 빠른 안무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동작을 중첩시키고, 전기 톱과 끌을 이용해 거칠게 표현되어 있다. 회화를 전공한 작가는 회화적 조각, 조각적 회화를 실험한다. 특히, 동시대 매체의 영상 감각을 조각으로 담아 내고 있다.
모두 같은 머리망을 한 거대한 여성의 상반신 다섯 개가 벽면을 마주하고 있다. 거대한 조각상의 겉면은 프렌치 프라이 포대, 상업용 박스 등의 종이로 만들고, 얼굴과 머리카락은 흑연과 색연필로 그렸다. 신민 작가는 저임금, 고강도 서비스직군에 밀집되어 있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드러내고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희망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종이 몸’을 만드는 황수연 작가는 거대한 세 덩어리의 조각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이 조각들은 마치 로봇 장난감을 조립하듯 몸통으로 서로 끼워 맞출 수 있다. 황수연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인체 스케일을 기준으로 한다. 사람의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자를 활용해 만든 속이 텅 빈 ‘종이 몸’은 전통 조각의 개념을 전복한다. 작가는 납작하고 가벼운 종이로 텅 빈 조각을 만든다.
돈선필 작가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의 색상으로 미로 같은 좌대를 만들어 피규어와 같은 조각상들을 올려놨다. 좌대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조각상들의 이미지가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면서 장면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대량 생산 산업 또는 인터넷 이미지 유통 시스템을 작품으로 그려 내고 있다.
최태훈 작가는 이케아의 가구로 뼈대를 만든 후 그 위에 우레탄 폼을 부풀려 작품을 만들었다. 기성품은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작가의 기준대로 재구성되어 작품만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작가의 작품들은 사물의 기능화 형태로부터 독립되어 자생적인 조각으로 존재한다.
김주리 작가는 젖은 상태로 형태가 유지되는 ‘젖은 흙’을 만들었다. 이 시리즈는 북한과 마주보고 있고 다양한 문화가 교류되는 접경 지역인 중국 단동시의 압록강 하구 습지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 작가는 자연인듯 인공물이며, 형상이지만 질료 그 자체로 생성되고 사멸되는 물질의 순환과 거기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순간을 경험으로 만들고자 했다.
최고은 작가는 압력 밥솥, 에어프라이어, 컴퓨터 모니터 등과 같은 일상 속 가전 제품의 형태를 대리석으로 만들고 그 밑단을 절단해 조각하여 마치 토르소 조각상처럼 높은 좌대에 올려 놨다. 작가는 관객들로 하여금 대량 생산되는 물건들의 형태를 돌로 깎아 조각 작품으로 선보임으로써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되돌아보고, 생산물들을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산업 시스템을 고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김채린 작가의 조각은 관객들이 직접 만지고 체험하며 몸으로 감상하는 작품으로, 관람자가 몸으로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연구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예술품과 일상용품 사이 어디엔가 있는 대상으로 조각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실험한다.
“조각충동”전은 노원구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2년 8월 15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