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는 현대 한국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탁영(1937-2012) 작가의 사망 10주기를 계기로 현대 한국화를 돌아보는 전시 “연속과 분절: 정탁영과 동시대 한국화 채집하기”를 개최한다. 전시는 7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된다.
고(故) 정탁영 작가는 1960년대 묵림회(墨林會)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서양 추상 미술이 도입된 이후에 등장한 수묵추상(水墨抽象) 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또한, 2000년대 이후 마분지에 커터 칼로 그린 ‘칼그림’으로 한국화를 확장하려 했다.
전시는 전통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정탁영 작가의 문제의식을 뒤돌아보고, 한국화의 다양한 방법론으로 전통과 동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동시대 작가 11명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다.
구나영(b. 1983)
구나영 작가는 한지와 먹을 주 재료로 현대인의 초상을 수묵 풍경으로 표현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패턴들은 나무를 모티브로 하는 동시에 인간 군상이기도 하다. 짙은 색은 삶의 무게를 담고 있으며, 거친 붓 터치는 고요한 한편 역동성을 드러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춘다.
권세진(Kwon Sejin), '깊은 밤,' 2018, 캔버스, 종이에 먹, 130x193cm
권세진(b. 1988)
권세진 작가는 사진 위에 먹과 한지를 가지고 도시의 일상적 풍경을 그리는 대형 수묵 작업을 한다. 한 풍경을 여러 번 촬영해 이미지를 확대한 후 정사각형의 조각으로 나눠 수묵으로 그린다.
그리고 다시 하나의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산수 기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내 작가의 개인적 해석을 부여하며 ‘도시 산수화’를 그려낸다.
김은형(b. 1977)
김은형 작가의 현대 수묵화 작품은 화선지, 먹, 모필 등 전통적인 매체를 활용해 오페라나 조선의 풍속화 등 동서양 고전을 재해석한다. 그리고 이를 드로잉, 설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 작가는 내면의 초현실적인 장면들을 캐릭터화시켜 여러 이야기를 한 장면 안에 펼쳐낸다.
김인영(b. 1983)
김인영 작가는 에나멜 페인트를 활용해 산수화를 그린다. 작가는 에나멜이 갖는 질료적 특성을 그대로 살리고 우연성을 가미해 추상화의 형태로 작품을 표현한다. 매끄러운 에나멜의 표면이 흘러내리고 뒤엉키면서 그림은 운동감을 가지게 되고, 묵직한 재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중력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작품의 이미지가 갖는 의미보다는 작품 자체의 ‘물성’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민재영(Min Jaeyoung), '회의실,' 2021, 한지에 수묵채색, 57x100cm (10EA)
민재영(b. 1968)
민재영 작가는 수묵화에서 사용되는 묵이라는 재료로 인해 배제되어 왔던 색상을 작품을 통해 부각시킨다. 특히, 그는 TV 주사선인 빨강, 초록, 파랑 (RGB) 세 가지 색상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 이미지를 한지 위에 수묵화적 방법론으로 그려낸다. 작가는 단절된 도시인의 삶 그리고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비대면 시대에 화상을 통해서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그린다.
손동현(b. 1980)
손동현 작가는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옛 우리 그림 양식으로 그려 동양화의 지평을 넓힌 작가이다. 인물에 대한 탐구를 해 오던 작가는 최근에는 전통적 산수화의 표현 기법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예컨대 한지를 구겨 분무기로 산세를 만들고, 레고로 탁본을 떠 새로운 풍경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또한, 다양한 설치를 통해 그림 밖으로 자연 풍경을 연장시켜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드는 건축적 ·구축적 장면을 구성한다.
유승호(Yoo Seungho), '라멜라 양_1,' 2021-2022, 캔버스에 잉크와 아크릴릭, 245x183.6cm
유승호(b. 1974)
‘문자 산수화’라 불리는 유승호 작가의 풍경들은 선이 아닌 글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멀리서 보면 그림 속 도상들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형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은 사라지고 텍스트만 보인다. 이미지와 언어의 재현성이라는 기능에서 탈피하고자 한 유승호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펜’이라는 매체로 관심사를 옮긴다. 펜으로 선을 그린 후 분무기를 통해 이미지를 번지게 해 원래의 이미지를 우연한 형태를 이끌어내고 추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본인이 만든 ‘문자 산수화’를 변형하고 전복시켜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를 새롭게 탐색한다.
이지영(Lee Jiyoung), 'Forest Stage- 역할극,' 2020, 장지에 연필, 130.3x161cm.
이지영(b. 1980)
동물원 속 동물들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물원’을 그리는 이지영 작가는 연필을 사용해 군상화를 그린다. 연필이 주 재료로 사용되는 것은 재료의 특성상 갖게 되는 인공적 느낌이 그림 속 인물들을 가두는 동시에 보호하기도 하며 드러나는 층간 구조 및 대칭적 구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물은 인공적 산수로서 현대 사회와 제도 내에 존재하는 획일성, 욕망, 몰개성 등을 표현한다.
진민욱(Jin Minwook), '소소경 逍小景-서울숲,' 2019, 비단에 수묵채색, 114x178cm.
진민욱(b. 1980)
진민욱 작가는 도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공적 자연물을 비단 위에 자연도감처럼 세밀하게 표현한다. ‘소소경’ 연작에서는 서울을 산책하며 관찰한 인위적 자연물을 그림 속에 작가의 의도대로 배치해 일종의 현대적 산수화로 표현한다. 장엄한 자연 풍경이나 화려한 도시 전경이 아닌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듯한 풍경은 오히려 산수화의 의미를 전복하며 소소한 도원경을 그려 낸다.
최은혜(b. 1983)
최은혜 작가는 본인의 내면을 한지, 비단, 유리 등을 활용해 우거진 숲으로 재현한다. 어릴 적 기억, 추억, 감상을 끊임없이 재편집하고 재구성하여 만들어진 이 ‘미지림’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우거져 있다.
미지림 속 식물들은 공존을 향하는 의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되며 하나를 이루는 표상으로서 ‘원’ 또는 ‘달’의 형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최은혜 작가는 심상화된 산수를 그렸던 전통적 산수화의 철학을 이으며 산수화의 현대적 변용을 만들어 내고 있다.
허진(b. 1962)
허진 작가는 정신성을 표현했던 고전 산수화의 방법론에서 벗어나 역사와 현실 문제를 구체적인 서사로 표현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화합하는 세계를 희망하며 유목 동물과 여러 이미지를 함께 그려 넣기도 하고, 문명 속에 부유하는 인간 형상과 동물의 이미지를 겹쳐 넣어 인간이 처한 현실을 강렬한 색채로 부각시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