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경 작가는 다양한 문화 유물을 비누로 재현해 이들을 현대 미술로 재맥락화한다. 그의 개인전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이 코리아나미술관과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에서 2023년 6월 10일까지 진행된다.
신미경 작가는 비누로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상부터 아시아의 도자기와 불상까지 다양한 문화 유물을 재현하는 조각 작품을 만든다. 이를 통해 작가는 고전 작품을 특정 문화적 배경에서 떼어 내어 현대 미술로 재맥락화해 재현의 불완전함을 보여 주고자 한다.
신미경 작가의 작품들은 현재 코리아나미술관과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6월 10일까지 펼쳐지고 있는 그의 개인전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에서 만나 볼 수 있다.
2003년에 개관한 코리아나의 화장박물관은 설립 취지를 ‘온고지신’으로 두고 한국 화장 문화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코리아나미술관은 동시대 미술을 기본 틀로 ‘신체’, ‘여성’, ‘아름다움’에 대한 주제를 탐구하는 기획전시를 개최해 왔다.
이번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전은 4개 층에 이르는 두 공간의 소장품들을 아우르며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를 오가는 신미경 작가의 작품 120점을 관람할 수 있다. 그중 70 점이 새로 공개되는 신작이다.
신미경 작가가 비누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더 이상 레진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였다. 원래 작가는 레진을 자주 사용했지만 영국 유학 당시 레진은 그 유독성 때문에 사용이 금지되었다. 작가는 대체재를 찾던 중 우연히 화장실에서 발견한 작은 분홍색 비누가 마치 대리석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주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리석은 특히 전통 서양 조각에서 자주 사용하던 재료였다. 하지만 유학 당시 성행했던 개념 미술에게 밀려 전통 미술은 미술 담론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작가는 그러한 상황에 의문을 품었다. 작가는 전통 조각 또한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동시대성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해 오히려 새로운 매체로 전통 조각품을 구현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가의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원본과 복제품의 관계를 재고하게끔 이끈다. 작가가 가장 처음 재현한 작업 중 하나가 로댕의 ‘더 키스’ 조각이었다. 영국의 도시 루이스에서는 로댕의 작품이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했다. 해당 작품은 얼마 후 테이트에 판매되었고 이후 1999년 루이스에서 한 전시를 위해 작품을 미술관으로부터 다시 대여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로댕의 조각 작품을 보며 작가는 실제 크기와 모양이 같은 ‘더 키스’를 비누로 복제한다면 진품을 대체할 수 있는 작품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조각상, 불상과 도자기 등 다양한 고전 예술품들은 당대에는 종교적, 문화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가지게 된 예술품들은 뮤지엄(박물관 및 미술관)에 들어가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맥락으로 읽히고 있다. 작가는 뮤지엄이라는 공간 속에 들어가면서 고정불변의 가치를 갖게 되는 고전 유물들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고자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녹아 사라지고 쉽게 무르고 변형되는 물질적 특성과 비누 조각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이번 코리아나미술관의 개인전 제목으로 사용된 ‘시간’과 ‘물질’은 신미경 작가의 작업적 특징을 드러내는 동시에 뮤지엄을 관통하는 주요 개념이기도 하다. 신미경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단순히 예술품의 배경으로 간주되는 뮤지엄 공간을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다차원의 구조로 선보이고자 했다.
지하 1층의 첫 전시관에 들어서면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를 마주하게 된다. 해당 연작은 작가가 2014년부터 진행해 오던 ‘페인팅 시리즈’의 더 확장된 형태이다. ‘라지 페인팅 시리즈’는 대형 철제 틀에 상당한 양의 비누를 녹여 색과 향을 첨가해 굳혀서 만든 작업이다. 제목에는 회화라고 쓰여 있지만 연작은 오히려 조각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작품은 200kg의 육중한 무게를 갖고 있으며 눈으로 색과 질감을 느낄 수 있고, 후각을 통해 향을 느낄 수 있다.
한 층 아래에 위치한 두 번째 전시관에는 신미경 작가의 작품들과 코리아나의 소장품들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전 서양 조각과 회화 작품 사이에 신미경 작가의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2023)와 ‘페인팅 시리즈’(2014~2023) 그리고 ‘트랜스레이션-그리스 조각’(1998)이 전시되어 있다. 마치 진짜 골동품과 같은 모습을 한 비누 조각은 재현의 개념을 뒤집고 있다.
5층과 6층은 화장박물관 공간으로, 5층에는 쉽게 깨질 것 같은 투명한 유리 도자기를 구현한 ‘고스트 시리즈’(2007~2013)가 있다. 또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사용된 청동 거울이 있는 유물장에는 비누 조각에 은박과 동박을 씌워 시간의 흔적을 박제한 듯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2018)를 선보이고 있다.
6층에는 여러 이유로 눌리고 변형된 인물 또는 불상의 비누 조각 위에 브론즈 캐스팅한 신작이 있다. 쉽게 변형되어 모양이 물러진 비누 조각상은 다시 캐스팅되어 그대로 박제되었다. 또한 5개월간 한 백화점 남녀 화장실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비누 조각상 ‘화장실 프로젝트’(2004~) 6점이 다시 유리 진열장 안에 설치됐다. 실용적 용도와 미술관의 전시품 사이를 오가는 작품이 된 것이다.
지하 1층과 지상 5층의 남녀 화장실에 놓여 있는 ‘화장실 프로젝트’(2023)의 비누 조각상 4점은 직접 작품을 손으로 만지거나 심지어 변형시킬 수도 있다. 지하 1층 계단에서 보이는 야외 공간에도 비와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비누 조각이 놓여 있다.
신미경(b. 1967)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런던대학 슬레이드 미술대학 대학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신미경 작가는 아르코 미술관(서울), 스페이스K(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대학교미술관(서울), 성곡미술관(서울), 학고재 갤러리(상하이), 브리티시 뮤지엄(런던), 브리스톨미술관(브리스톨)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2020), 스톡홀름 국립미술관(2020), 경기도미술관(2019),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2017) 등 국내외 유수 기관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신미경 작가는 올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초대형 비누 조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