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이은실과 그의 작품에 관한 - K-ARTNOW
이은실 (b.1983) 대한민국, 서울

이은실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2006)하고 동대학원에서 동양화과 석사학위를 취득(2014)하였다.

개인전 (요약)

현재(2022)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대안공간 풀(서울, 한국),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서울, 한국), 두산갤러리 뉴욕(뉴욕, 미국), 유아트스페이스(서울, 한국) 등에서 전시했다. 2021년 이태원에 위치한 갤러리 P21(서울, 한국)에서 《Unstable Dimension》이라는 제목으로 2년 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룹전 (요약)

아라리오갤러리(천안, 한국), 코리아나미술관(서울, 한국), 소마미술관(서울, 한국), 우양미술관(경주, 한국), 인디프레스갤러리(서울, 한국), 리움미술관(서울, 한국), 퍼디힉스갤러리(런던, 영국), 이노쿠마겐이치로현대미술관(마루가메, 일본), 국립현대미술관(과천, 한국), 경기도미술관(안산, 한국), 인사미술공간(서울, 한국)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가하였다.

수상 (선정)

제19회 송은미술대상(송은문화재단, 서울, 한국) 우수상을 수상하고 제29회 중앙미술대전(중앙일보, 서울, 한국) ‘올해의 선정작가’로 선정되었다.

작품소장 (선정)

작품 소장처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한국)과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과천, 한국)이 있다.

주제와 개념

이은실의 그림은 당황스러울 만큼 도발적이어서, 당신이 전시장에서 이은실의 작품을 만난다면 다른 관람객을 의식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혹은 은닉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은실은 전통 회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여 인간에 내재한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들을 드러내 보인다. 작가가 바라보는 욕망은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인 동시에 갈등과 정신적 질환을 야기하는 삶의 차원이다.

이은실 작가는 성교나 배설과 같이 우리가 흔히 금기시해 온 것들을 거침없이 화면 위에 펼쳐 보인다. 기묘한 살갗과 뒤엉킨 나무 덩굴, 수면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잔털, 붉은 선혈과 분비물, 남녀의 발기된 생식기, 짐승 같은 존재들. 차별적인 구조의 권력과 사회가 만들어 낸 틀들이 강하게 억눌러 말로 꺼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채색과 건조를 반복해 완성한 그림의 바탕은 두텁게 가라앉은 심해처럼 느껴진다. 뿌연 안개처럼 답답하고 축축한 공기 속에 은밀하고 성적인 도상들, 인간의 욕망이나 신체를 은유하는 자연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면의 벽은 무너지다 못해 땅속으로 꺼질 지경이지만
지속적인 침전의 상황에서 엉망이 된 시간들,
본질은 기억 속에서 길을 잃은 상황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률적인 규범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눌러 분열되고 병적인 자아들로 만들어낸다. 이은실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족의 구조와 여러 가지 삶의 문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의복과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갈등과 정신 질환의 양상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작법과 이야기 소재들을 과거로부터 빌려온다. 이은실의 그림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호랑이들은 사람을 대신해 동물적인 본능에 몰두하고 있으며, 해체된 모습의 전통 가옥들은 다양한 의미의 구조를 화면에 부여한다.

이은실에게 전통적인 회화 매체, 그리고 삶과 현실은 무궁무진한 예술과 표현의 원천이다. 작가는 관찰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과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양상을 지켜본다. 그녀는 잠재된 차원을 가시화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양하고 원초적인 욕망들이 발현되어 우리 사회에 보다 큰 생명력이 부여되기를 소망한다.

형식과 내용

이은실의 작품을 보면 전래 동화의 한 장면 속에 흘러 들어온 듯하다. 전통적인 모티프들이 배치되어 있지만 사실성이 결여되어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조성된다. 또한 가옥의 안과 바깥같이 다양한 공간의 요소가 자주 나타나는데, 구조체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들여다봄으로써 각각의 작품의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다.

전통 가옥과 같은 건축물의 구조는 화면 속에서 안과 밖을 나눈다. 건축의 형태는 회화의 화면을 시각적으로 구획하는 틀로 기능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집은 안전한 장소나 가정, 가족의 관계를 은유하는 공간이다. 또한 우리를 그 안에 가두고 사회적으로 틀 지으려 하는 경계가 될 수도 있다.

창이나 문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안과 밖은 반대쪽을 엿볼 수 있는 관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실내는 은밀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다. 바깥에서는 보일 수 없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 소곤거리는 ‘안’의 장소이다. 반면 빛과 바람, 물과 같은 자연은 이러한 가옥의 경계와 억압에 구애받지 않고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흐른다.

때로는 얇고 반투명한 막으로 이루어진 직육면체의 방 형태로 경계의 공간이 제시된다. 혹은 가옥의 벽이 모두 사라져, 해체되고 뒤틀린 형태로 변모하고, 직육면체 또한 풀어 헤쳐져 무작위의 무수한 면으로 화면 속을 부유한다. 이렇게 작품 속에서 해체되어 버린 공간의 요소들은 불완전하고 허술하며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임에도 여전히 잠재된 욕망을 통제하고 있다.

이은실은 그동안의 작품에서 가상의 시공간과 앞뒤가 맞지 않는 풍경을 통해 왜곡된 자아와 욕망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근작에서는 더욱 상황의 묘사가 모호해지며, 성적인 도상이나 갈등 관계의 구조보다는 개인이 갖게 되는 정신 질환의 양상을 표현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작가는 규정된 가치에 부합하기를 강제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불안과 강박, 결핍, 분열에 사로잡히는 인간상을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모두 개별의 삶의 모습을 찾아 나가기를 요청한다.

지형도와 지속성

이은실은 데뷔와 동시에 새롭고 충격적인 작가로 한국 미술계에 등장했다. 작가는 첫 개인전을 갖기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젊은 모색 2008 I AM AN ARTIST》 전시를 위해 선정한 17명의 작가군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장소성이 강한 몇몇 대안공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던 이은실이 리움미술관의 《아트스펙트럼 2014》와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의 2013년 기획전시 《한국화의 반란》에 참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은실은 이전에 없던 가장 새로운 한국화를 보여준 작가였고, 한국에서 가장 주요한 미술 기관들이 공통으로 소개한 신진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주목을 바탕으로 2016년 이은실의 작업이 미국에서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워싱턴에 위치한 아메리칸대학교박물관에서 《한반도의 사실주의 미술》을 주제로 단체전에 참여하고, 당시 ‘한국적 회화’를 지속해서 선보이고 있었던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개인전을 연 것이다.

세계에 어필하기 위해 ‘한국적인 예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며 또 어떻게 전통 회화를 계승해 나갈 것인지, 당시의 한국 미술계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은실의 작업 세계는 이전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한국화에 고착되었던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한다. 한국화의 양식적 다양성을 누구보다도 전복적으로 확장시킨 예술가라는 점에서 이은실은 한국화가로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위치를 점한다. 또한 계속해서 기법의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전통의 답습에 머무르지 않는 동시대적 한국화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은실은 새로운 회화적 시도를 거듭하면서 우리 사회의 차별적 구조와 욕망의 은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왔다. 어느 순간 불현듯 수면 위로 나타나지만 또 한동안 잦아드는 욕망의 모습처럼, 작가는 느리지만 꾸준한 호흡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은실의 작업이 어떻게 다시 새로운 한국화의 지평을 열어나갈지 계속해서 주시해야 할 것이다.

메모; 이은실과 그의 작품에 관한
임근준(aka 이정우), 미술·디자인평론가

이은실(b.1983)과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6 서울대학교 졸업 미전”에서였다. 다소 몸에서 겉도는 성장을 하고 머리에 잔뜩 웨이브를 넣은 그의 모습은, 마치 1980년대의 이화여대생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눈빛만은 ‘시간대를 초월하는 정신세계를 지녔다’고 증언하는 것 같았다. 예의상, 너무 에둘러서 말했나? 그럼, 좀 더 생생한 느낌이 나도록 고쳐 말해보자. 이 여자, 분명 제 정신이 아닐 듯싶었다.

졸업 미전에 출품된 이은실의 작품들도, 그린 이의 정신세계가 일반인의 시공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망’이라는 제목의 수묵채색화는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 만든 고요한 산수의 풍광을 제시하는데(사실 자세히 보면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곳은 창문 너머의 공간으로 제시돼 정상성의 시공간과 대별된다. 그 가운데 단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발기한 성기를 늘어뜨린 숫호랑이와 성기에서 피를 흘리는 암사슴. 따라서 처음엔 이 황당한 상황 설정에 정신이 팔려, 노골적으로 성기를 은유하는 바위와 골짜기, 연못, 폭포, 나무 등이 두 마리의 짐승을 위한 미장센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어렵다.

작품들은 하나 같이 몽롱한 성욕의 세계에서 번져 나오는 습한 공기로 가득했다. ‘대체 이 학생은 뭘까’하며 흥미를 느낀 나는, 명함을 건네고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느라 정신이 팔린 이은실은, 옆에서 기다리는 낯선 사람에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남학생 둘에 여학생 하나였던가,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꽃다발을 들고 있던 남학생의 표정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공대생처럼 생긴 그는 필경 동아리 친구였을 텐데, 그는 이미 거침이 없는 이은실의 작품 해설에 완전히 압도된 상태였다. 얼굴 표정을 문장으로 번역하면, ‘엄마야, 나는 어서 집에 가고 싶어요.’ 정도? 꽃다발을 쥔 그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몸이 굳은 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온 친구 옆에 바싹 붙어서 설명을 듣는 다른 남학생의 표정은, ‘미대생 이은실이 노골적인 성적 욕망의 이야기를 술술 늘어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당황하는 수준을 넘어 약간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차리지 못한 이은실은,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고등학교의 윤리 선생님이 기계적으로 교과 내용을 설명하듯 그림을 설명해 나갔다. “호랑이가 사슴을 겁간했는데, 사슴은 상처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 힘에 이끌려서 호랑이를 몰래 바라보고 있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훔쳐 듣다보니, 꽤 보수적인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어떻게 이런 종류의 작업이 생존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갔다. 너무 해맑게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추진하는 탓에, 교수나 강사들은 언제 어떻게 이 문제적 학생을 제지해야할 지 몰라 기회를 놓쳤을 테다. (두려움이 없는 하루 강아지를 호랑이가 덥석 물어 죽이지 못하고, 죄책감이 없는 성추행범의 손길에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 얼마 뒤, 졸업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을 미술 잡지의 지면에서 소개할 기회가 있었고, 당연 이은실도 취재 대상이 됐더랬다. 당시 그는, 대학 시절 가장 뿌듯했던 일이 “이 한몸 다 바쳐 사랑했던 것”이고, 개인전을 열고 싶은 곳은 “창경궁”이며, 10년 후엔 “세계를 누비며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쌈지레지던시프로그램에서 마주한 이은실은, 대학 졸업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불과 채 2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소간 지친 모습이다. 작품의 수가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물으니,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작업이 삶에 너무 밀접하게 공조되거나, 혹은 삶이 작업에 큰 영향을 받게 되면,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좋을 때는 작업도 잘 나오고, 삶에도 탄력이 붙지만, 그 반대의 주기가 찾아오면, 다시 털고 일어서기가 영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작가를 잘 아는 것은 아니므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을 풀어가는 방식을 좀 정리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현재 이은실의 작품들을 보면, 남상하는 문제의식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모르는 형국이다. 그의 그림엔, 성교와 배설의 서사에만 주목하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층위들이 꽤 많다. 일단 아무렇게나 해부해보자.

• 남성기, 여성기, 젖꼭지, 항문, 엉덩이 등의 페티시를 통해 드러나는, 고통의 영역에 중첩되는, 성적 쾌락 (기승전결이 분명한 남성적 오르가즘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선 남성의 쾌락도 여성의 클리토리스 중심적 오르가즘처럼 파도치듯 반복되는 오르가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그림 속의 남성기는 크게 과장된 모습인 경우라 해도, 마치 클리토리스의 확장 형태처럼 독해된다. 대표적인 예가 작품 [사정지통]이다. 숫사자는 사정한 뒤의 쾌락, 즉 자신의 ‘포스트-오르가즈믹 칠’(여성이 오르가즘 뒤에 겪는 가벼운 오한과 멜랑콜리한 감정)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묘사됐는데, 이 세상에 그런 이성애자 남자는 없다. 대부분의 남자는 사정한 뒤엔 바로 딴사람이 되는 법.)
• 인간남녀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짐승들(거대한 여성의 성기를 지닌 사슴, 거대한 남자의 성기를 지닌 사자 등)
• 충혈 상태의 말단 이미지(실핏줄의 페티시)
• 자연 염료 성분을 채색하고 건조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형성된 갑갑하고 습한 느낌의 색조
• 붉은 피의 상징적 등장
• 번져나가는 분비물의 표현
• 물(강, 폭포, 연못 등)의 상징적 등장 (삶과 죽음의 경계, 분출하는 욕망 따위의 중의적 알레고리)
• 쪼그리고 앉아 배설하는 남자 (고사관수도 따위의 인물을 대치하는 설정)
• 짜깁기를 통해 재구성된 산수풍경 (전거가 되는 그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 미장센으로 등장한 나무의 체모 같은 표현 (미약한 수준의 초현실주의적 이중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 미장센으로 등장한 바위와 골짜기의 남녀성기 같은 표현
• 몽롱체(朦朧體)의 양상을 띠는 촉각적인 점의 축적
• 머리카락의 페티시
• 피학과 가학의 드라마
• 안팎의 경계를 드러내는 (전통) 건축 공간의 은유
• 기타 등장 요소: 달, 해, 무덤, 변기 등
• 은유적인 작품 제목
• 상당한 볼륨감을 갖는 장지 배접의 프레임

이 모든 요소들을 한데 안고서 일관된 형식의 연작을 그려나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때로는 작가가 뱉어놓은 도저한 주제가, 작가 자신을 압도해버리는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나온 그림들은 일종의 청사진이다. 내가 가진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작업을 통해 풀어 나가야 마땅한 (혹은 물어 나갈 수 있는) 주제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미완의 지도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을 쏟아낸 결과만이 ‘진짜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에너지 투여가 많은 작업이 관객에게 더 어필하거나 더 잘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내면의 밑바닥에서 게워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젊은 작가에겐 축복이다. 아직은 젊으니까 계속 토하며 극단으로 자신을 밀어붙여보는 일도 가능하겠다. 하지만 계속 토악질을 시도하는 것은 현명치 않다. 토사물들을 잘 가늠해서 하나하나 다시 재분석하고, 더 키워 볼 것들이 발견되면 확실히 더 배양해봐야 옳다. (이미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토한 상태다.) 그림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자면, 오래오래 작업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과욕을 버리고, 과제들의 우선순위를 정해 다시 냉정하게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게 전업 화가를 지향하는 사람의 자세다. 예를 들어, ‘이번 상반기엔 체모의 페티시라는 주제를 호랑이와 사슴의 국부 클로즈업으로 탐구하는 30점의 연작을 제작한다’고 마음먹어보면 어떨까. 

추신. 본격적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평하는 일은, 평자와 작가 모두를 위해, 내일의 과제로 아껴두기로 하자.

References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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