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갤러리정미소(서울, 한국)에서 개최한 두 번째 전시《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부터 개인적인 기억을 재료로 심리적 풍경을 그려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아라리오갤러리와 전속 계약 이후 백아트갤러리(로스앤젤레스, 미국), 에드윈스갤러리(자카르타, 인도네시아), 트라이엄프갤러리(모스크바,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작품이 소개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2020년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서울)에서《사각(死角)》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그룹전 (요약)
국립현대미술관(서울), 주벨기에 한국문화원(브뤼셀, 벨기에),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환기미술관(서울), 인디프레스갤러리(부산), 아메리칸대학교박물관(워싱턴, 미국), OCI미술관(서울), 일민미술관(서울) 등에서 전시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경기문화재단(수원), 포스코미술관(서울), 경남도립미술관(창원), OCI미술관(서울), Nesrin Esirtgen 컬렉션(이스탄불, 터키)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제와 개념
이진주의 회화는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매개로 기억을 탐구한다. 작가는 끈질기게 자신을 사로잡는 기억들을 반복해서 들여다보고, 기억으로부터 포착된 감각을 심리적인 풍경으로 그려낸다.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조용한 파국, 때로는 고통스럽고 잔혹한 현장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 입는 것이나 먹는 것들, 사용해서 닳거나 없어지는 것들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과 장소들을 본뜨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와 인과 관계가 결여되어 관람자는 마치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에 진입한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하거나 부분들 간의 논리적인 연속성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이진주의 그림은 관람자의 시선을 빼앗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림 속 자그마한 사물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리하게 되고, 인물들의 행위를 쫓아가며 그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강력한 회화적 힘은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고 정밀한 형태와 질감의 표현에서 온다. 동양화 매체를 사용하는 작가의 정교하고 세밀한 묘사력은 초현실적일 만큼 불분명하고 모호한 상황들을 너무나도 선명한 감각으로 그려낸다.
사실적인 외형의 인물과 사물들로 이루어진 낯선 세계는 작가가 자신의 일상과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린 사유들을 담고 있다. 인간의 지식이나 믿음의 영역과 그 경계에 대한 의문,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 사회적 사건들, 가족과 죽음에 대한 생각, 마당 있는 집의 풍경, 말로 옮기기 어려운 과거의 트라우마 같은 것들. 그 파편들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유기적인 하나의 화면을 만들어 낸다. 작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심상인 동시에 현실에 맞닿아 있는 세계이며,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무한히 반복되고 이어지는 예측할 수 없는 장소이다.
“심리적인 주관의 세계를 그리긴 하지만 동시에 모순되게도 나는 나의 현실, 이 세계의 현실을 담고 싶다.”
이진주의 작품은 이성적인 언어나 사회적인 규범들이 언제나 감추고 숨기려 하는 우리의 불안한 실존을 그려낸다. 이따금 우리는 기억이나 상상 속의 세계로 잠시 도망치지만, 그것들은 현실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현실로부터 온 것들이다. 이진주의 회화는 계속해서 기억을 불러오고 어루만짐으로써 현실을 직면하고,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기 위한 작업이다.
형식과 내용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기억도 망각되고 유실된다. 이진주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현재가 덧붙여지는, 기억이 왜곡되는 양상을 탐구한다. 고요하고 정제된 작가의 그림에서 우리는 말하지 않는 인물들의 몸과 살갗, 손이나 절단된 신체를 보게 된다. 화면 이곳저곳에 반복해 등장하는 인물들로부터 그림 속 이야기가 비선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속 사물들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이 촉발하는 감각이나 기억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된다. 오직 작가만의 사적이고 내밀한 감각으로 선택된 사물들의 의미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지고, 우리는 다만 그것이 무엇의 알레고리인지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진주는 정밀하고 꼼꼼한 묘사를 위해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기울인다.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심상의 이미지와 유사한 형태의 실제 사물을 구하거나 만들고 있다. 동양화 매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전통 방식만을 고수하기보다는 작업의 성격에 맞추어 적절하게 재료를 바꾸어 선택한다.
동양화에서의 채색화는 보통 장지를 사용하지만, 준비하는 공정을 간단히 하고 스케치를 수정하며 작업하기 위해 광목천을 지지체로 사용하고 있다. ‘블랙 페인팅’ 시리즈(2017~ )에서는 더욱 극적인 연출을 위해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높은 채도와 매트한 질감이 극대화되도록 직접 물감을 새롭게 배합했다.
이진주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공간성 또한 인상적이다.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땅은 부유하는 듯이 보이고 무의식의 영역처럼 보이는 지하 공간을 감추고 있다.
조각난 대지는 커다란 행성이나 무한한 영토의 일부분을 떠낸 것처럼 보이는데, 작가는 세밀한 원근법으로 평면 위에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낸다. 빛의 명암 없이 균일한 밝기의 선명함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으며, 모든 요소들은 일관된 비례와 시점을 유지하며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형도와 지속성
이진주는 2014년 두산갤러리 뉴욕(뉴욕, 미국)에서 개최한 미국 첫 개인전에서 전통적인 동양화의 기법과 현대적 감성이 접목된 동시대 회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프랫 인스티튜트(뉴욕, 미국)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국제비평가협회(AICA-USA) 이사회 임원을 역임한 도미닉 나하스는 이진주의 작품이 놓쳐서는 안 될 매혹적인 감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환영적 화면은 이진주만의 독창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또한 동양화의 납작하고 매트한 표면 질감은 서양화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다.
이진주는 광목천과 분채 안료 등의 동양화 재료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동양화에서의 여백이나 시점의 이동과 같은 요소를 화면 구성에 적용하기도 한다. 셰이프트 캔버스를 활용하거나, 전시 공간을 주의 깊게 계획하여 전시장 벽 자체를 작품의 여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구조물을 써서 눈높이의 회화를 입체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설치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대형 회화가 A자 구조로 놓이는〈사각〉(2020)은 어디에서도 전체 화면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업이다.
관람자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회화 속 대상들을 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유도는 동양화의 긴 두루마리 그림을 감상할 때 발생하는 시각적 경험과 유사한 관람자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이렇듯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는 이진주의 작품 세계는 전속 화랑인 아라리오갤러리와의 파트너쉽을 통해 국제적으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진주의 작품은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동시대 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 매체적 특성과 뛰어난 시각적 완성도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요소들이다. 끊임없이 변주하며 한국적인 회화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작가의 활동이 기대된다.
화이트큐브 서울에서는 9월 5일부터 12월 21일까지 개관전 ”영혼의 형상“을 진행한다. 화이트큐브는 1993년 런던에서 개관한 이후 뉴욕, 파리, 홍콩 등 세계 각지로 분점을 확장 중인 갤러리이며, 서울에서의 개관은 홍콩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이다. 이번 전시는 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인간의 행동 동기를 탐구하는 회화 및 조각들을 모아 전시한다.
7인의 작가, 크리스틴 아이 추(Christine Ay Tjoe), 버린드 드 브렉커(Berlinde De Bruyckere),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카타리나 프리치 (Katharina Fritsch), 루이스 지오바넬리(Louise Giovanelli), 마르게리트 위모(Marguerite Humeau), 이진주의 작품이 전시에서 소개된다.
몇몇 작품 및 작가를 살펴보면, 영 브리티스 아티스트(yBAs)로도 알려진 트레이시 에민의 회화와 드로잉에는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 석관 모양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승과 저승 사이를 부유하는 듯 보인다.
받침대 위에 검은 손 하나가 올라가 있는 < Hand >(2020)는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품으로, 프리치는 친숙한 사물이나 형상을 낯설게 변형시켜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버린드 드 브렉커의 < Arcangelo Glass Dome II > (2021-23)에서는 모피가 하이브리드된 신체를 감싸는 형상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이 실체화된다.
국내 작가 중 유일하게 전시에 참여하는 이진주는 한국화 기법을 사용해 묘사된 섬세한 손이 인상적인 <블랙 페인팅 연작>을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