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인간은 사회에서 혼자서 살 수 없고 늘 타인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소통 없는 타인과의 삶이란, 어쩌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는 지옥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소통을 버거워하면서도 늘 오해 없는 소통을 꿈꾼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의 과정에서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소통을 꾀하면 꾀할수록 소통의 어려움을 깨닫고 다시,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존재의 쓸쓸함을 안고 말이다.
홍성철 작품의 주제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존재간의 소통’이다. 그는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이러한 존재간의 소통을 시도했다. 그가 이전의 작품에서 매체들을 사용해서 상호 작용적인 작품들을 선보인 이유도 소통을 위해서였다. 매체를 이용해서 좀 더 소통의 기회와 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런 그가 변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매체를 통한 상호 작용적 작품을 선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통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매체를 통한 소통의 노력을 포기한 것인가?
둘 다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이며 원시적인 소통의 가능성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던 소통의 과정에서 겪은 소통의 어려움들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그는 그간 사용했던 매체를 이번 작품들에서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매체가 주는 번거로움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까지 상호 작용성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할 때 사실 번거로움을 느끼곤 했다. 매체 예술들은 상호 작용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과 조작을 수용자에게 권한다.
어쩌면 이는 수용자에게 작품에로의 몰입과 관여라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반면 번거로움과 작동 불가능이라는 황당한 상황을 연출해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많은 매체 예술 전시회에서 기술상의 이유로 이 작품은 지금 작동되지 않는다는 설명문을 볼 수 있었다. 작동되지 않는 상호 작용적 매체 예술 작품은 전시에서 전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일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종종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을…
그래서 홍성철은 이러한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소통의 원형적인 형태로 되돌아간다. 바로 실이 그것이다. 그에게 실은 관계의 부재와 오해 속에서 생긴 소통의 원초적인 욕구가 만나는 지점이다. 실은 터진 곳을 엮어주기도 하고, 다른 대상과 연결시켜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짐으로써 비로소 사회 속에 던져지게 된다.
탯줄의 끊어짐은 인위적인 소통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한 실 또는 줄에 그는 주목한다. 그래서 그는 손이라는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다시 실 또는 줄에 프린트해서 이를 다시 엮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그가 이미지를 매개해서 표현하는 실이라는 매질뿐만 아니라, 매개해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대상이 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손, 우리는 외부세계와 접촉할 때 오감을 사용한다. 특히 시각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눈으로 하는 지각과는 달리 손으로 하는 지각은 직접적인 지각이다. 관조적 거리두기가 아닌, 직접 만지고 체험하는 그러한 지각인 것이다. 직접 지각이 주는 효과는 매우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만지고 느끼려고 한다. 타인과의 소통을 확인하기 하기 위해 손을 잡기도 하고, 또 그 손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낯섬과 쓸쓸함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런 손이 그의 작품에 지각의 소통 통로가 아니라, 대상으로 등장한다. 아니, 작가 자신이 바로 손이고, 그래서 작가는 결국 손을 통해 또 다른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손들은 마치 눈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손이 수단이 아니라, 주체가 된 것이다. 허나 그 손들은 헛헛하다. 소통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의 손들은, 아니 그는 무언가를 갈구한다. 갈구하는 손짓들은 쓸쓸하다. 무언가를 잡으려 하는 듯하기도 하고, 잡기를 포기하고 혼자 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손이 등장하는 작품은 손이 두개이기 때문에 더욱 존재의 쓸쓸함을 가중시킨다. 두 개의 손은 때로는 어긋나 있고, 또 때로는 손등을 마주 하고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손은 바로 홍성철 자신인 것이다. 그는 손을 통해 자신의 소통의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굵은 실에 프린트된 손들은 뚜렷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즉 경계가 모호하다. 또 자세히 보면 하나의 손 뒤에는 그림자처럼 또 다른 하나의 손이 겹쳐져 있다. 손들은 애매하게 중첩되어 있다. 이 또한 작가 자신의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여지는 손(자아)만이 아니라, 뒤에 숨어져 있는 또 다른 손(자아)들… 이는 타인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분열된 자아간의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소통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와의 화해를 통한 자기와의 소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성철의 또 다른 작품들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조그마한 LCD 모니터 조각들을 사용한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실에서 모니터로 그리고 모니터 사이 사이로 섞여있는 거울로의 전환.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이러한 급작스러운 매질의 전환이 있는 것이며, 이는 실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모니터와 거울은 둘 다 외부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외부 세계와 연결의 역할을 하는 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쨌든 그는 외부 세계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해서 이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집착이 낳은 결과이다. 실은 고정되어 있지만, 다분히 유동적이기 때문에 흔들린다. 즉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LCD 모니터 조각들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들도 빛에 의해서 다르게 반응한다. 각자 다르게 반응하는 조각들은 더미를 이루면서 마치 하나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결국 그는 다양한 매체들을 실험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하나의 매체를 고집함이 없이 다양한 매체들에 열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물론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에는 다양한 매체들을 사용해서 상호 작용성을 보여주는 그러한 작품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좀 더 나은 소통의 가능성을 위해서 일 것이다.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면 할수록 아마도 존재의 쓸쓸함과 소통의 불가능성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아마도 다양한 매체들과 소재들을 통해 아픔의 과정 또한 보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실들의 중첩과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레이어 효과를 보여주듯이 그는 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도 마치 레이어처럼 겹쳐지고 중첩될 것이다. 이 겹쳐짐과 중첩을 통해 손에 굳은살이 생기듯, 존재에도 굳은살이라는 내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성은 소통의 과정에서 오는 존재의 쓸쓸함을 앞으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할 때 아마도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