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서구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이 초감각적으로 포착해서 묘사했듯 그 성질이 액체처럼 유동적이다. 견고한 사회규범과
이념들이 녹아 흐르듯 무너졌고 절대적인 기준은 권위를 잃었다. 기반과 경계가 녹아 없어지고 다양한 영역과
가치들은 서로를 넘나들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실로 모든 것이 자유로워졌다.
반면, 액체의 유연한 자율성을 얻은 만큼 사회의 불안정성은 가중되었고 저항할 힘 또한 액체화되어 다수의 개인은 불안정한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원래 유동적이고 비정제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처한
액체 시대의 불안정성과 이에 따른 새로운 권력들에 제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는 중이다.
유승호 작가의
작업을 보면 현대사회의 액체성이 짙게 느껴진다. 문자나 이미지처럼 견고하고 구체적인 형식을 다루지만
서로 상반되는 두 성질의 것이 서로를 넘나들면서 서로로 변화되고, 화면의 구성은 액체처럼 유동적이다. ‘뇌출혈’이 ‘natural’이 되고, ‘natural’은 산이 되어 지고한 풍경을 이루다 어떤 부분은
이내 새가 되어 화폭 저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래로 흘러내려 민초들이 웅성거리는
주변 풍경이 된다. 그 운동성은 반대로도 작동한다.
대부분의 비평은
그의 작업에서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많은 상충된 관계들이 넘나든다. 언어와 언어, 전통과 현대, 시와
회화, 의미와 형상, 추상과 구상, 표면과 깊이, 표현과 고백 등, 결핍된
존재들이 화폭을 구성하는 요소로 포진해 있다. 이들은 다소 언어유희나 장난어린 낙서, 유머의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그려진 문자나 이미지가 변형되면서
서로가 되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작위나 의도라기보다 필연적인 현상인 양 자연스럽다.
애벌레가 나방이
되고 나방이 알을 낳듯이 애당초 서로를 자기 안에 담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너, 아님 연인, 궁극에는 삶과 죽음처럼 근원적인 결핍을 갖고서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중인 듯도 하다. 그리 보니 작가는 화폭에서 서로가 되려고 치열하게 꿈틀거리는 문자나
이미지들을 그저 멍하니 보다가 적절한 때에 붓을 들이대서 그들의 요구와 결핍을 채워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 <머리부터 발끝까지>에서는 서예의 서체 중 초서를 활용한
붓글씨 형상이 화면의 주를 이룬다. 지난 이십여 년간 줄곧 해왔던 펜 작업에서 붓글씨 작업으로의 전환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물론 지난번 개인전 <머리채를
뒤흔들어>(페리지갤러리, 2015) 전의 뇌출혈 연작에서
붓글씨를 사용했었고, 한참 전의 작품 'I go'(2005)에서도
그 형식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붓글씨 연작의 시작점은 <전통이
미래다>(일주&선화갤러리-현, 세화미술관, 2016) 전에서
“석봉행초첩”의 석봉 글씨를 차용하여 제작한 작품 '떡♨(2015)'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전시를 계기로 붓글씨를 화폭의 주요 요소로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이전 작품에서 초서와의 유사성이 발견되는 만큼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인다. 게다가 북송시대 곽희나 범관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들도 여럿 있었는데, 초서가
동시대에 시작된 서체라는 사실도 연관되니 말이다.
작가는 글씨에
담긴 기운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획은 크게 확대하고 어떤 획은 위치를 변경하는 등, 전체적으로 형태와
구성을 변형해서 초안을 만든 다음 큰 화선지에 옮겨 그렸다. 가냘픈 선들의 율동은 정적이면서도 활기차서
흡사 기생의 몸짓을 닮은 것이 석봉의 초서에 담긴 그 기운이 유화백을 만나 제대로 완성된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한 달 정도 잘 보이는 벽에 놓아두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한 게 흥분되고 매혹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듣고 보면 그 고백이 그리 이상하지가 않다.
그 묘한 기분이 동기가 되어 붓글씨 연작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초서는 사실
문자라기보다 이미지에 가깝다. 풀의 모습을 닮아서 붙은 서체이니 당연지사이다. 자유분방함도 있고 역동적이기도 하다. 한자의 구성 원리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는 알다시피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象’은 코끼리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이고, ‘草’의 부수인 ‘艹’는 풀을 본떴다. 따라서
구상을 추상화한 문자이니 더 흘려 쓴들 그 글자가 본래 이미지에 가까우면 그 음이 무엇이든 의미를 전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만 그 형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북송의 휘종이든 조선의 추사나
석봉이든 초서를 즐겨 쓴 이들은 휘갈겨 씀으로써 역설적으로 글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유승호 작가에게도 그러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진즉부터 화폭에 써놓은 글이나 일그러진 형상들, 간혹 춘화에서나
볼 만한 야한 농을 거침없이 그려 놓는다든지, 정적인 풍경화에다 자기 말투처럼 툭 던지듯 붙인 제목
등을 보면서 알 수 있었지만, 이번 초서를 활용한 연작에서는 더 그렇다. 하루의 농사를 마치고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이나 논두렁에 새겨진 흔적에서 느낄 수 있는 흙냄새처럼, 고요하지만 대범하고 가냘프지만 묵직한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이 자신감
있는 자가 여유를 부리듯 멋스럽게 화폭에 옮겨져 있다.
예전에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조지훈은 한국적 미의식을 ‘멋’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율동성이 있는 곡선이나, 형태를 왜곡하기도 하고, 일관되게 해학을 유지하는 낙천성 등이 그가
찾아낸 멋의 내용이다. 나아가 멋의 진정한 의미는 초격미(超格美)로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말한다. 그렇게 보면, 초서는 초격미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다. 앞글자 ‘초’ 가 같은 것도
그렇지만, 모양을 모사해서 글자가 되었다가 그 틀을 벗어나서 급기야 움직임을 담은 형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황지우의 시 ‘503.’의 한 구절이다. 어느 미학자가 연설 중에 인용하였는데, 인상 깊어 기록해 놓은 시구이다. 그리고 유승호의 ‘초fool’(2017)을
보면서 떠오른 글이기도 하다. 3미터가 넘는 기다란 형광 주홍빛의 화폭에서 유독 눈에 띄는 글자는 '屮'이다. 추사가
쓴 다산초당의 현판에서 따온 ‘초’자다. 풀은 곧아서 삼지창
같고, 우람해야 할 산은 절편처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당시
군주와 유배에 처한 자신을 빗대어 놓은 의미일 수 있으나, 민초의 상징이자 초의 잠재된 힘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초’와 ‘풀’은 동의어인데, 붙여서 쓰니 ‘촛불’과 음이 유사하다.
초와 더불어, 화폭을 이루는 가늘기도 하고 굵기도 하여 힘의 강약이 느껴지는 유려한 획들을
보면 획이 지나간 자리에 얇은 선들이 삐죽이듯 그려져 있어서 마치 붓이 지나간 길에 자리를 내준 풀들을 보는 듯하다. 정자(正字)의 틀을 벗어난
선들이 화가의 붓질로 인해 길이 되었다. 공(空)에 잠재된 선을 찾아 드러내는 일은 형상에서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는 붓글씨를 쓸 때가 되었다.” 왜 펜 대신 붓인지 물어보니 작가가 한 말이다. 길이 앞에 있으면 걸어가면 될 일이다. 전통을 따르는 일, 그리고 사회에 길들여지는 일, 그러나 본래 길은 없다.
물길처럼 화가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 걸어가면 길은 생기는 법이다. 농부가 그랬고, 소와 낙타가 그러했듯이 유승호 작가는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막중한 중압감을 극복하고 구도자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초fool'을 비롯한 이번 작품들을 보면서
액체성을 강하게 느꼈나 보다. 액체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권력들과 이에 저항하는 민초들의 질박하고 순수한
운동성이 화면 전체를 유동적으로 만들고 있다.